박민이 하지 못한 '상식적인' 대답... 그 모욕적인 결과
<언론포커스>는 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진단과 언론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글입니다. 언론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써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말>
[이정환]
▲ KBS 박민 사장이 14일 오전 여의도 KBS아트홀에서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거듭나겠습니다’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 권우성 |
문화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박민이 KBS 사장으로 임명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파괴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치켜세우고, "이재명은 영화 '어벤져스'의 빌런 '타노스'와 같은 존재"라고 비아냥거렸던 사람이 마침내 공영방송의 사장이 됐다. 방송통신위원장 이동관과 사이를 묻자 "기분에 따라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인정했다.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의힘 의원 박성중이 물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주진우 라이브' 오프닝 멘트를 체크했더니 25회 방송 중 24회가 윤석열 당시 후보와 국민의힘에 대한 부정적 멘트였다. 허위, 왜곡, 가짜, 조작, 이걸 그대로 놔둬도 되는 것인가. 일벌백계 책임을 지워야 다음에 이런 게 발생하지 않지 않겠나."
박민은 이렇게 답변했다. "실제로 행정 제재를 많이 받았고 KBS 신뢰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조치하겠다."
▲ 박민 KBS 사장이 취임 첫 날 방송을 중단시킨 <주진우 라이브> 소개 이미지 |
ⓒ KBS누리집 |
질문도 답변도 모두 틀렸다
박민이 공영방송 사장의 책무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청문회에서 다음 다섯 가지를 지적했어야 했다.
첫째, 국회의원이 공영방송의 특정 프로그램을 찍어서 허위, 왜곡, 가짜, 조작이라고 규정하려면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정부와 여당에 부정적인 논조의 코멘트가 많았으니 편향됐다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다.
둘째, 공영방송 사장 후보자에게 특정 방송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애초에 공영방송 사장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도 적절치 않다.
셋째, 사장은 방송의 성향과 논조를 지시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고 임의로 결정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오히려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고 비판과 토론에 열려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게 공영방송 사장의 중요한 역할이다.
넷째, 설령 문제가 있는 프로그램을 폐지하더라도 그것은 방송사의 판단에 따른 것이어야 하고 여당 국회의원의 지시에 따른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사장을 바꿔서 프로그램을 바꿀 수 있다는 발상부터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다섯째, 공영방송 사장의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인 압력에서 방송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개인의 평가에 방송의 논조가 휘둘리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이 사장이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이런 정도의 상식적인 답변을 할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 자리에 오기도 어려웠을 거라는 데 있다. 박민은 정부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없애라는 사명을 띠고 내려왔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진우 라이브'가 공영방송에 적합한 프로그램이었느냐를 두고 의견이 다를 수는 있다. 다만 그 판단을 집권 여당이 하고 사장을 갈아치우는 것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렇게 바뀐 프로그램이 정치적 편향성에서 자유로울 리 만무하다.
대통령이 사장 후보자를 지명하고 여야 6대 3의 이사회가 임명 제청을 하는 시스템에서 인사청문회는 충성 서약을 하는 자리가 되고, 공영방송은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 지금 KBS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역사적 퇴행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다.
▲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고 있다. |
ⓒ 남소연 |
이런 비극의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 11월 9일 국회에서 방송 3법이 통과됐다. 공영방송 이사를 21명으로 늘리고 국회가 5명, 시청자위원회가 4명,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가 6명, 직능단체가 6명 등을 나눠서 추천하게 된다. 공영방송 사장 선임은 100명으로 구성된 국민추천위원회에 맡기고 대통령은 손을 떼게 된다.
왜 문재인 정부 때는 가만있다 이제 와서 밀어붙이느냐는 비판도 있지만 만시지탄이고, 어느 쪽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는가 생각해 보면 방향은 명확하다. 방송이 편향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장을 바꿔 해결할 게 아니라 사장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맞다. 공영방송의 공적 책무는 집권 여당의 실력 행사가 아니라 국민을 두려워하게 만들 때 가능하다.
더 이상 '언론인'의 탈을 쓰고 권력자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는 이들이 나서면서 방송을 황폐화하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해 정치 후견주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결단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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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이정환(슬로우뉴스 대표)입니다. 이 글은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www.ccdm.or.kr), 미디어오늘, 슬로우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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