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 왜 지웠나…영등포 수백억 자산가 살인사건 미스터리
우발적 범행으로 결론 나는 듯했던 영등포 80대 노인 살인 사건이 반전되고 있다.
피해자 A씨가 수백억원 대 자산가로 드러난 데다 옆 건물 모텔 주인이 살인 용의자 김모(30대)씨의 도주 경로가 찍인 폐쇄회로 TV(CCTV) 영상을 삭제한 사실이 확인되면서다.
A씨는 지난 12일 자신이 소유한 영등포동 건물 옥상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목에는 날카로운 흉기에 깊게 베인 흔적이 남았다. 경찰은 A씨 소유 주차장에서 주차관리 업무를 하던 김씨를 용의자로 특정해 12일 오후 9시 32분 강릉에서 붙잡았다.
김씨는 “평소 A씨에게 무시를 당했다”며 살인 혐의를 인정했지만 경찰은 CCTV 영상을 삭제한 모텔 주인 조모(40대)에 주목해 같은 날 체포했다. 서울영등포경찰서는 14일 김씨에게 살인, 조씨에게 살인교사 및 증거인멸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①지적장애 2급 주차관리인의 불분명한 범행동기
사망한 A씨는 사건이 발생한 건물을 포함해 그 일대 건물과 토지, 아파트 등을 소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친분이 있었던 건물 관리인과 인근 자영업자 등에게 “550억원이 있는데, 그 돈으로 대부업을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범행이 발생한 건물은 영등포역 인근 대로변에 있는 지하 1층·지상 5층짜리 560㎡(170평) 규모다. 인근 부동산에선 건물 시세를 120~130억원 가량으로 추정한다.
경찰이 가진 최초 의문은 김씨가 갑자기 A씨를 살해한 동기였다. 김씨는 2급 지적장애인이었다. 김씨는 “A씨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진술했지만, 김씨는 평소 A씨뿐 아니라 주변 상인들, A씨 건물 3층의 고시원 거주자들과도 잦은 마찰을 빚어왔다.
그와 갈등을 겪었던 한 상인은 “잦은 마찰이 그가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A씨 소유 건물의 고시원에 살고 있는 한 남성도 “다른 사람들이 주차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자기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바로 반말이나 욕설을 해 주변 상인들이나 고시원 입주자들과 갈등이 많았다”며 “주변 상인들도 ‘동네에서 저렇게 일하면 인심 다 잃는다’고 혀를 찼다”고 말했다.
②옆건물 모텔주인은 왜 CCTV를 삭제했나
그런 김씨가 유독 살인교사 혐의를 받는 모텔 주인 조씨만큼은 잘 따랐다고 한다. 한 고시원 입주자는 “조씨는 건물 건너편에서 카페를 하는데, 카페 앞에 누가 담배꽁초를 버리면 반말로 ‘주워’라고 하는데, 김씨도 다른 사람한테 똑같이 하더라”며 “둘다 안경을 쓰고 하는 짓도 비슷해서 처음엔 둘이 형제인 줄 알았다”고 했다.
조씨는 김씨가 도주하는데 도움을 준 핵심 인물이다. 경찰이 현장 조사과정에서 김씨 도주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조씨의 모텔에 찾아가 CCTV 영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조씨는 거부했다. “영상이 며칠 주기로 삭제된다”는 등의 이유를 둘러댔다. 경찰은 설득 끝에 CCTV를 확보했고 조씨를 임의동행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상을 삭제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경찰은 범행 직후 현장을 벗어난 김씨가 최초 은신해 있던 곳도 조씨가 운영하는 모텔 인근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는 사건 당일 오후 5시 무렵까지 숨어있다가 도주해 용산역에서 강릉행 KTX에 몸을 실었지만 같은날 오후 9시 32분 강릉역에서 하차하다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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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금전 편취 아닌데…수백억 자산가가 살인 타깃된 이유는
조씨 역시 A씨와 관계가 나빴던 것으로 조사됐다. “조씨도 2년 전까지는 A씨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고시원 거주자)지만, 건물 주차장 부지를 임대한 조씨가 월세를 내지 않으면서 관계가 악화됐다는 것이다. 조씨는 2020년 7월 A씨 소유 주차장 부지를 보증금 500만원·월세 150만원에 임대했다. 조씨가 32개월간 월세를 내지 않자 A씨는 지난 6월 퇴거를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발송한 데 이어 9월엔 부동산인도소송을 제기했다.
A씨의 유족들은 “조씨가 지역 재개발 조합장을 하고 싶어했으나, A씨가 반대했고 갈등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범행이 사전에 계획된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건물관리인 B씨(70대)는 “비상구 주변에 물건이 늘어놓아져 있었는데, (사건 발생) 하루이틀 전에 입구 주변이 다 치워져 있었고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씨가 범행을 사전에 계획하고 도주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비상구 입구에 물건을 치운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김씨는 또 오전 6시 무렵부터 A씨 출근을 기다렸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먼저 체포된 김씨는 수사 초기 자신의 범행만 시인했지만 계속되는 추궁에 조씨로부터 범행을 지시 받았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조씨가 지적장애 등으로 취약한 김씨를 지휘·감독하는 위치에서 살인을 지시한 것으로 보고 단순 교사죄가 아닌 특수 교사 혐의를 적용했다. 형법에 따르면 자기의 지휘·감독을 받는 자를 교사했을 경우 해당 범행 형량의 최대 2분의 1까지 가중처벌할 수 있다.
이보람 기자 lee.boram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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