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읽히는 '달거리 흑역사'와 여성들의 분투

김유경 2023. 11. 1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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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책씻이] 자칭 '촌년' 이화리 작가가 쓴 <달꽃>

[김유경 기자]

작가의 말에서 "촌년, C급 작가"로 스스로를 부르는 이화리(필명)는 경주 본토박이다. 소설 써서 받은 문학상은 여럿이되 장편소설 <달꽃>이 첫 책이다. 심지어 MZ세대가 밀치기 쉬운 문장, "도덕산(道德山)이 붉다"로 시작해 "음력 춘삼월, 수밀도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는 계절이다"로 끝나는 작품 세계는 경주 토속어의 보고다. 물론 촌말 옆 괄호에 표준어를 넣어 책읽기에는 무리가 없다. 외려 낮은 존재였던 여성의 달거리(월경) 얘기에 빨려들게 하는 타임머신 격의 효과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달거리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달꽃>의 여성성은 일제 강점기 가부장제에서 생명성으로 존중받기보다 남성의 성적 수단이었으니 지금과는 분명 격세지감이 있다.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는 <제2의 성(Le Deuxie、me Sexe)>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여성은 세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습되고 길들어져 여성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달꽃> 속, 정조를 안(못) 지킨 영임과 상금의 그늘진 삶처럼 말이다.
  
"무척 성가신 월경, 이 달꽃"
 
 달꽃 표지.(청어, 2023)
ⓒ 청어
 

완고한 유교문화를 반영하는 경주의 산 이름, '도덕산' 주변의 붉은 기운이 만삭의 영임이 사는 외딴집을 비추는 초반부 서술의 조감도가 복선으로 읽히어 <달꽃>은 얼핏 대하소설 무게로 다가온다.

영임과 윤호는 모자다. 온정이 뚝뚝 떨어지는 영임 모자의 몸짓과 청각을 자극하는 찰진 사투리 또한 옛스런 시공을 각인시키며 그런 착각을 연장시킨다. 최근에 읽은 국내 신간 소설들에는 없는 감칠맛이 확 느껴져서다. 그 시절 여성의 흉금에 닿게 하는 작용도 암암리에 하면서.
  
수저가 입에 닿기도 전 혀를 길게 뽑는 아이와 아이를 향해 숟가락을 든 여인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이는 마주 보는 거울 효과의 연쇄반응에 의해 주(主)와 객(客)이 하나 되는 순간이다. 즉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밥을 마치 자신의 입인 양 동일시하여 둘이 동체임을 은연중에 느끼는 행위였다.

"인떨아야(이 녀석아), 암만 배고파도 겅걸(걸신) 딜리디끼(들린 듯) 묵지마래이. 새알(사래) 걸린다."
"어매, 디기(되게) 맛있다. 칼치 더 도(줘)." (책 11쪽)
  
사전에서 '달꽃'은 달무리의 방언이다. 그러나 <달꽃>에서는 여성적 행동이자 여성성을 가리킨다. 소설 속에서 졸지에 성폭행을 당한 상금을 가리키는 "어느 가여운 달꽃 비밀 하나를 위해"(243쪽)와, "무척 성가신 월경, 이 달꽃"(278쪽)이 그 예시다.

아마 당시 여성이 그만큼 낮은 존재였다는 암시일 것이다. 그래서 그 달꽃의 억압감이 급작스럽게 뻥 터지는 상큼한 이미지의 결말이 의외로 반갑다. 작가의 필력에 낚여 빠르게 완독한 탓에 뒷이야기가 아쉽긴 해도 상금의 해방감이 내게까지 와 닿는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사실은 현실의 이야기 

남성은 월경에서 자유롭다. 지금도 달거리는 여성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가신데 '개짐'으로도 불리던 당시는 더 했을 것이고, 불미한 일이 생기면 꼬투리 잡히기 십상이었으리라.  

영임의 친정인 설씨 문중은 대다수가 천도교도였지만, 큰외삼촌 양녀가 된 상금이 근본 운운하는 유교 문화의 차별적 쑥덕거림에서 놓여나게는 하지 못한다. 책을 읽고 있던 나를 놀라게 한 건 가뜩이나 기죽은 상금이 고의로 장애인이 된 사연이다. 일본군의 "정액받이, 성노예"를 피하게 하려 외삼촌인 의사가 상금의 발뒤꿈치 인대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참담한 사건은, 작가에 따르면 작가의 어머니가 정신대 차출 때문에 현실에서 직접 겪은 일이란다. 또한 영임의 임신과 사망은 작가의 큰어머니가 살던 마을사람 얘기고, 어미를 잃고 젖동냥이나 암죽 대신 재첩국물로 살아난 아기(상금) 얘기는 부산의 작은 고모에게서 들었단다. 수십 년을 작가의 심중에서 발효된 여성의 얘기들이 <달꽃>에서 쓰인 셈이다.
   
백의(白衣)의 우리 민족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듬해였다. 일본 식민지 36년 간, 봄바람은 여린 싹의 앞날에 땅을 치며 울고, 녹음은 지들끼리 부대껴 시퍼렇게 멍들이고, 단풍도 이 산 저 산 소지하듯 불타고, 눈(雪)도 긴긴밤 뜬 눈(目)의 눈물이 되었었다. 해방이 되자 봄바람은 새싹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먹이고, 녹음은 튼튼한 가지에 생혈로 흐르고, 단풍도 말술에 취한 얼굴로 들썩들썩 풍년가를 부르고, 겨울이 되자 비로소 눈 같은 눈이 겨울잠으로 내린다. (책 138쪽)
  
변화 더디지만 그래도 희망 놓지 않는 건 

해방을 맞아 민족의 숨통은 트였지만, 일상에 쌓인 적폐를 등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는 여기서 영임의 아들 윤호, 진견(眞見) 스님을 호명한다. 상금에게는 "한 어미를 둔 오라비"인 그다.

죽은 어미를 향한 친할머니의 패악이 합방을 못 이루게 하더니 끝내 윤호의 각시 연이를 연못에 빠지게 만든다. 작가는 당시 여성의 성적 트라우마가 노소 가리지 않고 삶의 심층부에 똬리를 틀고 있으면서, 때로는 남성의 일상마저 뒤틀리게 했음을 샅샅이 비춘다.

자신의 안위를 타의에 맡겨야 하는 성적 피해자 여성의 갈급증에 비해 세상의 옳은 변화는 한참 더디게 온다. 이야기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세세히 제시하는 <달꽃>의 대목들은, 당시의 세상이 '흠집 생긴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했을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작가는 그런 여성을 대신하려는 듯, 여성을 성폭행하는 등 차별하고 대상화한 남성 인물 세 명이 사고를 당하게끔 한다. 읽는 중에 상금의 처지에 역지사지 감정이입하던 내 체증은 이 지점에서 가라앉는다.
  
몇 년 전 한겨레신문사를 드나들 기회가 있었을 때, 이화리 작가를 서너 번 마주했다. 그 개인적 인연을 떠올리며 <달꽃>을 읽고 작가에게 직접 전화했다. 소설 속 영임과 상금이 겪은 이야기가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를 그래서 알 수 있었다.

한국어가 외계어처럼 변형되는 판국에 경주 토속어가 나와서 반가웠다고, 그 시절 관혼상제에 대해 새삼 알게 되었다고, 경주에 많이 가서 더는 구경할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가 볼 곳이 꽤 생겼다고, 달거리 흑역사가 술술 읽힌다고 등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도 작가의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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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newcritic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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