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서 나오는 말만 '언어'인가
10월 9일 한글날만큼 주목받아야 할 날이 있다. 바로, 2월 3일 한국 수화 언어법 제정을 기념하는 날이다. 2016년 제정된 한국 수화 언어법은 한국수화언어가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언어임을 밝혀 농인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수어가 한국어와 같이 대한민국의 공용어로 지정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어 통역과 교육은 제자리걸음이다. 코로나19로 수어 통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했으나 일상적인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농인의 수에 비해 수어 통역사는 현저히 부족하며, 농인이 자립할 수 있을 만한 인프라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초등학교부터 당연하다는 듯 배워온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는 농인의 정체성을 얼마나 품고 있는가.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닿는 농인의 언어를 따라가 봤다. <기자말>
[김명진, 박윤서, 백채원, 황현하 기자]
▲ 수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송기우씨(오른쪽)와 송씨의 수어를 통역해 주는 ‘코다’ 수어 통역사 송정섭씨(왼쪽 두번째) |
ⓒ 취재팀 '해늘' |
"부모님께서는 제게 늘 '말을 할 줄 알아야 해'라고 하셨죠"
자신의 이야기를 손으로 전하는 송기우 씨의 총명한 눈빛과 달리 통역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현장 분위기를 무겁게 했다. 비장애인 부모를 둔 청각장애인 송기우씨는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하게 '한글 문자'를 배워야 했다.
인공와우 수술을 받으면 일반 학교에 진학해 잘 적응할 것이라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송 씨의 학창 시절은 인내의 시간이었다. 수업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앉아 있어야만 했던 그는 농학교로 전학 후 수어를 처음 접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청각 장애를 갖고 있으나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농인들을 보며 송 씨는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눈만 봐도 소통할 수 있었던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았다. 보청기로 상대의 말소리를 들으려 애를 쓰고, 정확한 발음을 말하려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장애가 불편할 뿐 불행한 것이 아니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2020년 국립특수교육원이 발행한 특수교육 실태조사 <청각장애 학생이 특수학교로 전학한 이유> |
ⓒ 국립국어원, 그림 취재팀 '해늘' |
2020년 국립특수교육원이 발행한 '특수교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각장애인 학생 3,004명 중 2,466명이 일반 학교에 재학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0명 중 8명 이상의 수치다. 반면 특수학교의 청각장애 재학생 538명 가운데 절반인 272명의 학생이 일반 학교에 다니다가 특수학교로 전학을 간 것으로 조사됐다. 부모들이 자녀를 특수학교로 옮긴 이유를 묻는 말에 '특수학교 교육과정이 자녀에게 더 적절한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27.6%로 가장 많았고 '비장애 아동들과 함께 공부하거나 생활하는 일이 어려워서'가 그 뒤를 이었다. 이처럼 비장애인과 같은 교육과정을 배운 후 농인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아 수어의 배움은 늦어진다.
송 씨와 같이 청각장애인 중 '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농인'은 국내에 약 5만 2천여 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적절한 수어 교육 시기를 놓쳐 수어와 구어(음성으로 나타내는 말) 모두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한 농인의 수가 적지 않다. 청각장애인 수어 교육의 평균 연령은 15.6세이며, 특히 농인 10명 중 9명은 언어능력이 집중적으로 발달하는 유아 동기 이후에 수어를 배운다. 구어만을 강요하는 교육을 받다가 한국어와 한국수어 모두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게 된 농인들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다고 송 씨는 전했다. 또 농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 청인 속에서 생활해 온 사람 중에는 홈 사인(home sign;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몸짓 언어)과 같은 형태의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설명했다.
▲ 한경국립대학교 한국수어교원과 허일 교수 |
ⓒ 허일 |
▲ 한국수어와 수지한국어의 차이 |
ⓒ 국립국어원, 그림 취재팀 '해늘' |
수지한국어란 비장애인이 사용하는 한국어의 문법에 맞춰 손으로 언어를 표현한 것이다. 한국수어를 쓰는 농인에게 수지 한국어는 콩글리시와 같다. 단순한 소통은 맥락으로 파악이 가능하지만 문장이 길어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손으로 대화하면 다 같은 수어'라고 넘겨짚는 건 콩글리시도 잉글리시라는 얄팍한 논리에 불과하다.
수어는 손동작을 넘어서서 손의 위치, 움직임, 표정 등을 동시에 움직여 의미 정보와 문법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다. 이는 한국수어가 한국어 단어 그대로 손짓으로 옮겨놓은 기호가 아님을 의미한다.
허일 교수는 수지 언어와 수어를 분리한 미국을 예시로 들며 언어를 분리할 것을 강조했다. 미국의 경우 수지 영어를 'SE', 미국 수어를 'ASL'이라 명칭하며 농인협회 연차회의에서 SE(수지 영어) 통역사와 ASL(미국 수어) 통역사를 구분하고 있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 통역사를 요청할 수 있다. 그는 수지 한국어와 수어를 엄격히 다른 언어로 간주해 자격을 부여하고, 농인에게 언어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수지 언어와 수어의 용도, 문법, 수어 단어 사용법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 역시 언어학 측면에서 수지 한국어와 한국수어를 달리 취급해야만 농인의 언어와 삶 모두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은 수어 통역
"통역하면 당연히 외국어만 떠오르죠. 수어는 가끔 뉴스에서 본 게 다니까…"
통역은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기능을 갖는다. 우리는 일상 속 다양한 공간에서 언제든지 외국어 통역을 접할 수 있지만 공공기관, 대중교통 그 어디서도 수어 통역은 찾아볼 수 없다. 비장애인이 접하는 수어는 주로 지상파 방송뿐인데, 그마저도 뉴스에 한정된다.
▲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년도 등록 장애인 현황’ |
ⓒ 보건복지부, 그림 취재팀 '해늘' |
청각장애는 장애 비율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수어 통역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 장애인의 날(20일)을 앞두고 보건복지부가 4월 19일 발표한 '2022년도 등록장애인 현황'을 보면, 전체 인구의 5% 수준의 장애인 중 청각 장애인은 16.0%다. 청각장애가 장애 비율 중 두 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수이지만, 이를 지원할 수어 통역 인력이 부족하다.
2023년 9월 '코다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전국에 수어 통역센터가 190여 개 설치될 만큼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나, 센터당 지원되는 인력이 부족해 수어 통역사 1인당 최소 300명 이상의 농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는 수어 통역사의 업무 과중으로 대다수가 양질의 수어 통역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 국립국어원이 발행한 2020년 한국수어 활용조사 <농인이 수어통역사의 수어통역 서비스를 받은 경험> |
ⓒ 국립국어원, 제작 취재팀 '해늘' |
실제 국립국어원 조사에 의하면 수어 통역사의 수어 통역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53.6%로 전체 인원의 절반 남짓이었다. 동시에 순서를 많이 기다려야 한다는 응답 비율 또한 높았다. 통역사의 근무 환경뿐만 아니라 농인을 위한 적극적인 통역 제공도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한국 수화 언어법에 따라 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의 언어로 인정되었음에도 수어에 대해 외국어만큼의 기대나 전망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시민 대부분이 수어가 공용어인 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수어 통역의 전문성과 대중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청인이 수어를 낯설지 않게 느낄만한 장치가 필요하다. 수어 통역사 중 다수가 전문 분야 자격 소지자에게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의 수요를 인지하고 전문인력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가 할 일이다.
언어, 삶을 담고 문화를 길러내는 대지
UN 장애인 권리협약 제24조에서는 농인의 수어 학습과 언어 정체성 증진을 촉진할 것을 강조한다. 농인의 학업 및 사회성 발달을 극대화하는 환경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핵심이다. 농인의 의사소통을 위해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한국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이중언어 교육'이 해법이 될 수 있다. 음성언어 중심의 물리적 통합 교육에서 벗어나 농인에게 가장 적절한 언어를 확립할 수 있도록 돕는 유기적 통합교육이 필요하다.
청문회와 농문화의 공존을 위한 노력이 비단 청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농인 역시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소중하게 여기고 정당한 편의성을 누림으로써 농인의 언어(수어)를 보전하기 위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 또 농인 당사자는 수어가 오용 혹은 악용되지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언어는 문화의 산물인 동시에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며 공동체가 쌓아온 '삶의 보루'다. 이는 농인이 수어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자 수어를 사용해 온 농인에게 한국어를 강요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농인에게 수어는 농정체성을 품고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대지와 같다. 허일 교수는 농문화(Deaf Culture)를 '농인들의 지혜'라고 표현했다. 청인의 '듣는 능력'은 절대가치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농인도 농정체성의 특질을 인정하고 그들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에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결국 공존을 위해선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허 교수는 말한다.
"한국 사회에 사는 누구에게나 이 자세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남과 다르더라도 내가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방법을 찾아서 유능해져야 되겠죠. 그리고 이런 방법의 차이들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인식의 전환과 사회적 분위기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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