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가스라이팅 했어요" 누군가 자신의 판단을 흔들고 있다면…

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2023. 11. 1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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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제공
“며느리가 우리 아들을 가스라이팅했어요.” 유명 연예인의 어머니가 법정에서 외친 말이다. “그 사람이 저에게 임신했다고 가스라이팅했어요.” 최근 한국을 들썩이게 한 사건의 주인공인 유명 운동선수는 이렇게 외쳤다. 들어도 그 뜻을 알기 힘든 묘한 이 단어는 이제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일상용어가 됐다.

‘가스라이팅.’ <가스등(1938)>이라는 희곡(1944년에 영화화됐다)에서 유래됐다는 이 단어는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심리적인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거의 사용되지 않던 이 단어는 2016년 미국 대선 중 트럼프를 비난하는 과정에서 다시 살아났다(“트럼프는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 유권자를 가스라이팅시키고있다”). 이후 미국의 한 출판사가 2022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할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한 단어가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사용되고 있다면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일단 가스라이팅의 효과는 강력하다. 사이비종교에 가스라이팅 된 사람은 자신의 안위라는 인간 본연의 욕구마저 외면하며, 해당 종교와 교주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보인다. 자신의 자녀가 아파서 목숨이 위험해도 교주가 병원에 가지 말라고 하면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그 판단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니, 두려움까지 느껴진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스스로 사고와 판단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어제 저녁에 함께 김치찌개를 먹어놓고는 “어제 김치찌개 맛있었지?”라는 피해자의 말에 “무슨 소리야. 당신 왜 그래. 우리 어제 저녁에 된장찌개 먹었잖아. 기억 잘 안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사실 우리의 기억이란 생각보다 생생하게 저장돼 있지 않다. 단호한 가해자의 반응에 ‘우리가 어제 된장찌개를 먹었구나’라고 자신의 기억을 수정한다.

그 정도로 기억이 바뀐다는 사실이 놀랍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기억의 왜곡은 생각보다 쉽게 발생한다. 경찰에서 피의자 혹은 목격자에게 신문을 진행할 때 유도 질문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의도된 질문을 통해 우리의 기억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를 목격한 사람에게 ‘어제 빨간 옷을 입은 범죄자를 봤지?’라고 물어보면, 목격자는 범죄자 옷의 색상을 실제 기억하지 못했어도 그 질문을 통해 범죄자의 옷이 빨간색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수정할 수 있다.

가스라이팅의 경우에는 단순히 기억의 왜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고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잃게 하면서, 자존감과 판단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그 결과 피해자는 심리적으로 가해자에게 지배되며, 판단을 자신이 아닌 가해자에게 맡기게 된다. 이렇게 판단을 ‘외주화’시키면, 아무리 일반 상식과 어긋난 판단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은 피해자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영화·소설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가스라이팅.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실제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은 자신이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가스라이팅의 위협을 느끼는 걸까? 자신의 판단을 강요하는 직장상사, 당신의 꿈을 강요하는 부모, 사회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라는 사회. 그 안에서 나만의 판단을 내리기 힘든 모습이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건 아닐까?

사람은 나약하고 완전하지 못하다. 스스로 사고나 판단에 대해 의심을 갖는 것도 건강한 지성인으로써 필요한 태도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노력도 필요한 것 같다. 세대 차이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어떤 질문을 하면 구세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답을 맞던 틀리던 우기는데, 젊은 세대들은 스마트폰을 검색하며 그 안에서 답을 찾는다고 한다. 어떤 방식이 옳고 그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판단을 내가 아닌 남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위태로워 보인다.

보통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이 가스라이팅의 가해자가 된다고 하는데, 또 역설적으로 어느 정도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가스라이팅에도 굳건하게 잘 버틴다고 한다. 자기애는 타인의 지적이나 비판, 무시에도 자신의 판단을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친구 사이에서 누군가 당신의 판단을 흔들고 있진 않은가?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고 믿어보자. 아무리 힘들어도 판단을 외주 주는 것보다 스스로 판단할 때 가스라이팅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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