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의 마켓 나우] 반도체 ‘신항로 개척시대’ 이끌 이종집적
이종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 기술이 차세대 반도체기술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종집적 기술은 서로 다른 재료나 제조공정으로 만든 칩들을 쌓고 이어 붙이는 기술이다. 대만의 반도체 제조기업 TSMC는 최첨단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을 90%까지 독식하고 있는데, 메모리와 CPU라는 서로 다른 칩을 붙이는 기술에서도 가장 앞섰다.
TSMC는 이 기술을 10년 이상 연구해왔다. 5, 6년 전만 해도 이종집적기술 관련 논문을 학회에 제출하면 ‘최첨단을 연구하는 학회에 칩을 붙이는 저급한 기술이 웬 말이냐’는 평을 받았다. 이제는 이종집적이야말로 최첨단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메모리 시장에서도 메모리 칩을 여러 층으로 쌓고, 통신대역폭을 대폭 증가시킨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차세대 기술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이처럼 실리콘웨이퍼 위에서만 반도체를 만들던 시대는 닫히고 이종집적 시대가 열리고 있다. 실리콘웨이퍼 이외의 재료나 표면에 새로운 기능과 성능을 가진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미세화 패러다임이 한계에 부딪히자, 반도체 산업은 앞으로 자동차산업 같은 곳에서 발생하는 수요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산업으로 성격이 바뀔 것이라는 푸념 섞인 전망이 나온 적도 있었다. 이종집적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이 등장하기 전에 하던 이야기다. 앞으로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소재·소자·공정·장비·설계기술들이 밀려들어 올 것이다.
이종집적시대의 서막으로 당장 우리 눈에 띄는 변화는 HBM과 같은 메모리기술의 고도화이지만, 메모리와 CPU 간의 병목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되고 있는 차세대 DDR 메모리, PIM 반도체 등의 신기술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도 만만치 않다.
인텔은 TSMC·삼성 등 10개 회사와 연합한 UCIe 컨소시엄을 통해 여러 개의 칩을 이어 붙일 때 필요한 칩 간 연결기술을 표준화하여 구현했다. TSMC도 ‘3차원 집적 연합’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3D 패브릭얼라이언스(Fabric Alliance)를 결성해 30여개사와 함께 이종집적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삼성도 첨단패키지협의체를 출범시키고 이종집적시대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서구 국가들이 세계의 중심이 된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신대륙을 향해 떠났던 모험가들과 이들에게 투자했던 자본의 도전정신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전염병 전파, 원주민 학살 같은 어두운 측면도 있었지만 15세기 이후 ‘신항로 개척시대’가 가져온 변화를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반도체 산업에도 그에 못지않은 변화와 위기가 다가올 것이다. 경쟁국보다 앞서가려면 창의적인 도전정신과 과감한 연구개발투자가 절실하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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