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 커지는 부채공화국… 20년째 다이어트 딜레마
지난 20년 동안 한국 정부에 가계부채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은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유럽 등 주요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완만하게 감소하거나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지만 한국은 예외였다.
이에 2010년 주요 43개국 중 14위 수준이던 한국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6~2017년 8위, 지난해 기준 3위로 꾸준히 상승했다.
주요 선진국이 가계부채 규모를 착실히 줄여나가는 와중에도 한국만 부채비율이 ‘우상향’했다는 사실은 가계부채 논란이 번질 때마다 비판받는 주요 지점이기도 했다.
이에 금융당국은 지난 8일 무리한 가계부채 감축은 ‘독’이 될 수 있다고 선을 긋고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가계부채 관련 주요 이슈 Q&A’에서 “미국이나 유럽 일부 국가가 글로벌 금융위기나 코로나 위기 당시 상당 기간 가계부채 감축이 이뤄진 바 있으나 취약계층 주거 불안, 급격한 경기 위축, 재정 악화 등 극심한 부작용이 수반됐다”고 말했다.
금융위가 밝혔듯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계부채 디레버리징이 진행된 국가에서는 대체로 소비 둔화나 부동산 가격 하락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2016년 자본시장연구원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가계부채 현황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위기 직후 디레버리징이 진행된 그룹(덴마크·스페인·영국·미국 등)의 2008~2012년 부동산 가격이 3.58% 하락했다. 반면 가계부채가 증가한 그룹(호주·벨기에·캐나다 등)은 같은 기간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상승(2.88%)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 축소 이후 취약계층 주거 불안이나 경기 위축 등 부작용이 뒤따른 경우도 있다. 금융위가 제시한 미국 사례를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였던 2008년 대비 2010년 주택 차압률이 1.84%에서 2.21%로 높아졌고 실업률도 7.3%에서 9.3%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가계부채 감축은 필연적으로 소비·투자·경기 위축을 동반해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금융연구원 자료를 봐도 2000년대 이후 한국 가계부채 증가 추세는 소비 증가를 꾸준히 견인해온 사실이 분명하다. 특히 최근 성장률이 1~2%대로 크게 하락한 한국에 현시점에서 디레버리징은 ‘독’이 될 수 있다.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도 과거 금융위원장을 지냈을 때 “가계 소득 개선이 부진한 상황에서 무리한 부채 축소는 경제에 악영향을 미쳐 가계부채 관리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가계부채 비율이 높다고 무조건 금융안정 리스크가 커진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외인 국가들도 있다. 스위스(지난 1분기 기준 128.0%), 네덜란드(91.6%), 스웨덴(85.9%), 덴마크(84.4%) 등 주요 북유럽 국가들은 꾸준히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다른 국가에 비해 가계부채 비율이 높지만 이 문제가 금융·경제 시스템의 중대한 리스크로 부각되진 않는다.
북유럽 국가들의 특징은 높은 조세 부담을 바탕으로 보편적·포괄적이면서도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한다는 점, 주택 모기지 대출에 대한 세제 지원이 충분하다는 점 등이다. 아울러 이들 나라의 국민은 전반적으로 부채 보유 성향이 높고, 부채 상환 유인은 작은 경향을 보인다. 은퇴 이후 연금 등 적정 규모의 미래 소득이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 가계부채 리스크에 대한 대비도 철저한 편이다. 이미 대외적으로 대응력이 충분하다고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스크가 현실이 될 가능성에 대비해 거시건전성 수단, 부동산 세제, 모기지 대출 규제 등을 꾸준히 정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높은 가계부채 비율의 다른 국가들과 한국을 단순 비교하는 것도 ‘난센스’다. 한국은 북유럽 국가처럼 조세부담률이 높지도, 연금제도 등 사회적 안전망이 잘 발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가계부채 문제를 바라볼 때는 단순한 수치 비교도 중요하지만 외부 충격이 왔을 때 견딜 수 있는 대응 능력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한국이다. 현시점에서 정부가 대대적인 가계부채 감축에 돌입하기에는 가뜩이나 불안한 내수와 고용, 성장에 중대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또 가계부채 리스크에 충분한 대응력을 갖추기 위해 경제 시스템 체질 개선에 나서기에는 당장 성과를 보기 어려운 중장기 과제다.
한국처럼 디레버리징 없이 가계부채가 지속해서 증가하는 국가들은 ‘부채 규모의 연착륙’ 외에 다른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 가계부채 규모를 현상 유지 수준으로 관리하되 관련 리스크가 거시경제나 금융시장으로 번지지 않도록 완만한 조정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이에 전향적인 가계부채 디레버리징은 지금이나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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