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개편 사실상 후퇴…"일부 업종·직종에 근로시간 유연화"
노동개혁 일환으로 추진 중이던 근로시간 제도 개편과 관련해 정부가 지난 3월 발표한 원안에서 사실상 후퇴했다. 당초 전 업종을 대상으로 연장근로 시간 관리 단위를 조정하려던 방침에서 벗어나 ‘일부 업종·직종’에 한해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하는 쪽으로 선회하면서다. 지난 6월부터 사회적 대화를 거부해온 한국노총이 전격 복귀를 선언하면서 노사정 대화를 통한 구체적인 개편 논의는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3월 근로시간 개편안 발표에 역풍…尹 재검토 지시
고용노동부는 13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근로시간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3월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내놨다가 역풍을 맞은 뒤 8개월 만에 내놓은 대안이다. 앞서 정부는 현행 1주 12시간으로 제한된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확대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일이 많을 때 몰아서 하고 적을 때 오래 쉬자는 취지였지만, 원안대로라면 특정 주에 최대 근무 가능 시간이 69시간(하루 11.5시간씩 6일)까지 늘어나 장시간 근로를 불러올 수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는 건강 보호 차원에서 무리”라며 보완 검토를 지시했고 고용부는 국민 여론을 수렴하겠다며 지난 6~8월에 걸쳐 노·사·국민 6030명(근로자 3839명, 사업주 976명, 국민 1215명)을 대상으로 심층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국민 46% 연장근로 단위 확대 동의
연장근로 단위 확대에 동의한 비율은 근로자 41.4%, 사업주 38.2%, 국민 46.4%로 조사됐다. 세 집단 모두 긍정 쪽이 부정 쪽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았다. 다만 전체보다 일부 업종·직종에 한해 적용하는 방안을 묻자 동의율(근로자 43.0%, 사업주 47.5%, 국민 54.4%)이 더 올라갔다. 이성희 고용부 차관은 이를 반영해 “(원안과) 방향성은 유지하되 필요한 업종·직종에 대해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제조업·생산직에서 유연화 필요성↑
주 최대 근로시간 상한은 윤 대통령이 언급했던 ‘60시간’을 중심으로 검토될 가능성이 크다. 설문조사에서 주당 최대 근로시간 한도를 '주 60시간 이내', '64시간 이내', '64시간 초과', '모르겠음' 중 택하게 하자, 근로자 75.3%와 사업주 74.7%가 60시간 이내를 택했다.
한국노총 “대통령실 요청에 사회적 대화 복귀”
하지만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이 이날 오후 “한국노총은 오랜 시간 우리나라 사회적 대화를 책임져 왔으며, 노동계를 대표하는 조직”이라며 “한국노총이 조속히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여 근로시간 등 여러 현안을 노사정이 함께 논의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히면서 국면이 전환됐다. 한국노총은 해당 발언이 ‘노동정책 대화 파트너로서 존재를 인정하라’는 김동명 위원장의 요구에 답변했다고 해석했다.
한국노총은 입장문을 통해 “우리 사회는 급격한 산업전환과 기후위기, 저출생·고령사회 문제, 중동전쟁 등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저성장 쇼크의 장기화 등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며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여 경제 위기 등에 따른 피해가 노동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대노총의 한 축이 대화의 문을 열면서 정부도 고무적인 분위기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그간 사회적 대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온 노동계 대표 조직인 한국노총의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빠른 시일 내에 노사정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사회적 대화 복원을 위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한국노총은 대화를 해보겠다는 것이지, 정부 추진 방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지현 한국노총 대변인은 “대화와 투쟁을 병행하는 기존 한국노총 스탠스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지, 정부의 방향에 동의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경사노위에 복귀하더라도 의제 선정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9일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일명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한국노총의 반발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변수다.
전문가들 “업종별 선별 적용 바람직”…경영계는 ‘아쉽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획일적인 적용 방식을 접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획일적인 개편보단 여러 트랙별로 유연한 정책을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이슈별, 주제별로 다양하게 논의를 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최영기 한림대 경영학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도 “어느 한쪽에 유리한 개편안이 아닌, 변화하는 노동시장이나 기술 변화에 맞게 탄력적으로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 특히 업종별 특성이나 여성·청년 등 계층별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청취해 맞춤형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개편 방향이 크게 후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로 경영계에서 이런 입장이 제기됐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이번 내용은 지난 3월에 발표한 근로시간 개편안에 못 미치고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 등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중앙회도 “업종·직종별로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수요가 다를 수 있지만, 주 단위 연장근로 칸막이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기업의 성장과 생존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며 업종별 선별 적용 방향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세종=이우림·나상현 기자 yi.wo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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