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내내 적자 날땐 도와줬나" 횡재세 추진에 정유사들 폭발

이희권 2023. 11. 1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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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서울 시내 한 주유소의 모습. 연합뉴스


1년도 지나지 않아 정치권에서 다시 불거진 이른바 횡재세 논의에 정유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야권을 중심으로 최근 고금리·고유가로 역대급 실적을 낸 은행과 정유사 등으로부터 세금이나 부담금을 걷어 쓰자는 한국형 횡재세 추진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기업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유업계는 “올해 내내 적자를 낼 땐 외면하더니 겨우 흑자를 내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다시 횡재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지난 10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유가 상승, 고금리 때문에 정유사와 은행들이 사상 최고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며 “민생 위기를 극복하고 고통을 분담할 수 있도록 횡재세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유럽 많은 나라가 에너지 산업 대상으로 횡재세를 도입했다”고 덧붙였다. 해외에 도입 선례가 있기 때문에 정유사를 상대로 한 횡재세 도입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김영옥 기자


정유업계와 학계에서는 “기본적인 사업구조의 차이점조차 간과한 주장”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원유를 직접 시추해 판매하는 유럽과 미국의 석유 회사와 달리 국내 정유사는 원유를 수입해 정제한 뒤 판매하는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오르면 비싼 가격을 주고 석유를 사야 하는 것은 국내 소비자나 정유사나 마찬가지”라면서 “원유를 직접 생산해 유가가 오르는 것만으로도 큰 수익을 거두는 해외 사례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말했다.

경기 흐름에 따라 업황이 시시각각 변하는 반도체나 자동차 등 여타 산업과 마찬가지로, 정유산업 역시 국제 유가 변동에 따라 매입하는 원유 가격과 정제 후 판매가격이 변하면 언제든 손실을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당장 올 상반기 유가 하락에 따른 재고평가 등으로 정유사들은 큰 손실을 입었다. 정유사와 은행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없다며 선을 긋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정유업계 관계자는 “이자수익으로 적자 볼 일이 없는 은행과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불로소득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정유사를 상대로 한 횡재세 논란은 올해만 벌써 두 번째다. 앞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난해 사상 최대의 이익을 거둔 정유사를 상대로 횡재세를 물려야 한다는 주장이 올초부터 터져 나왔다. 지난 1월 이 대표는 “약 7조2000억원의 ‘에너지 고물가 지원금’을 지급하자”며 “재원 확보를 위해 에너지 관련 기업들이 과도한 불로소득, 또는 영업이익을 취한 것에 대해 전 세계에서 이미 시행하듯 ‘횡재세’ 개념의 부담금을 부과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경진 기자


이에 대해 업계 일각에서는 유가 하락으로 큰 손실을 볼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겨우 흑자를 내니 또 다시 횡재세 카드를 꺼내든다며 당황스럽다는 입장이다. 실제 정유사들의 핵심 수익성 지표로 꼽히는 정제마진이 손익분기점을 밑돌았던 올 2분기 정유업계는 큰 손실을 냈다. 당시 SK이노베이션은 석유 사업부문에서만 4112억원의 영업손실을 냈으며, GS칼텍스 역시 192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정유사를 대상으로 한 횡재세 도입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정유사를 상대로 한 횡재세 도입을 둘러싼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해외에서 석유를 시추하는 회사에 횡재세를 부과한다고 해서 그 회사로부터 높은 가격에 구입한 원유를 가공해 판매하는 국내 정유회사에도 같은 세금을 부과하자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라며 “무엇보다 국내 정유사들의 상당수 수익은 해외수출을 통해 나온다”고 지적했다. 실제 정유는 지난해 국내 수출 품목 중 반도체에 이어 2위를 차지해 ‘수출 효자’ 상품으로 꼽힌다.

은행과 정유 등 업종을 불문하고 이 같은 횡재세 논리가 장기적으로 시장경제 기능을 왜곡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만약 정유사나 은행을 상대로 한 횡재세가 가능하다면 반도체나 통신, 자동차 등 다른 모든 업계에도 이를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결국 기업에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불합리한 제도가 될 것”이라 했다.

이희권 기자 lee.hee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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