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좋아 독일 유학까지... 공고문 하나가 인생 바꿨죠"
[장혜령 기자]
'만분의 일초'는 말 그대로 찰나다. 검도 시합을 할 때 눈 깜빡할 새 없이 지나가 버린 죽도의 움직임이 승패를 가른다. 검도란 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짧은 순간, 상대의 빈틈을 놓치지 않는 찰나의 스포츠란 생각을 했다.
영화 <만분의 일초>에는 과거를 잊기 위해 검도를 시작, 국가대표 유력 후보까지 올라온 1인자 태수(문진승 분)가 나온다. 제목과 내용의 긴밀한 관계를 알 만하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강한 눈빛 사이로 보이는 소년미가 태수의 모습과 겹쳤다.
지난 11월 8일 만난 배우 문진승은 단편 <불청객>(2017)으로 데뷔했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달이 뜨는 강>, <모범가족> 등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알렸다. 독특한 이력이 있는데 데뷔 전 IT 기업에 종사했었고, 독일 만하임 대학교 대학원 시절 우연히 지원한 계기로 이탈리아 영화 <선샤인 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 영화 <만분의 일초> 문진승 배우 |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
-김성환 감독님이 기적적으로 찾은 배우라고 칭찬하셨어요. <만분의 일초> 참여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의 목소리 톤, 얼굴 생김새, 분위기, 말투가 태수와 겹쳤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대본 리딩 없이 미팅만으로 태수와 만나게 되었죠. 같은 공대 출신이란 공통점도 있었고요(웃음). 무엇보다도 국가대표 1인자라는 타이틀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절제된 캐릭터 같아서 도전 의식도 생겼고요."
-배우가 되기 전 IT 기업에 종사했던 독특한 이력이 있으시네요. 독일로 유학도 가셨고 이탈리아 감독님과 영화도 찍었다고 들었어요. 자세한 소개 부탁드려요.
"IT 전공이었는데요. 한국 스타트업에서 일하다가 백발의 프로그래머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독일로 유학하러 갔었어요. IT가 너무 좋아서 대학원 공부하면서 취직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3개월 정도 시간이 비었는데 어학 학원에서 본 공고가 저를 배우의 길로 이끌어 주었죠.
게시판에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 배우 모집'이란 공고가 눈에 들어왔는데요. 만나보니 이탈리아 감독님과 제작자였어요. 그렇게 대학 때 연극 동아리를 하면서 세 편 정도 단편에 출연한 경험을 살려 <선샤인 문>이란 영화를 찍게 되었습니다. 제목에서 '문'이 제 이름이기도 한데,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기에 입문한 계기는 대학원 재학 중 문득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결정했어요. 독일에 IT가 좋아서 왔지만 이 일과는 결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행복을 고민하다가 한국행 티켓 끊고 돌아와서 바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어요.
보조출연부터 도전했는데요. 주연 배우가 드라이 받는 모습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생각했었습니다. 4-5년 정도는 구인 사이트를 보고 하루도 안 빠지고 만 통 정도 지원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이미지 단역에서 대사가 있는 단역을 맡았고 조연으로 올라왔어요. 인연이 닿아서 오디션을 보고 필모도 쌓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즉흥적인 결정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즐기고 있고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물론 힘든 시기도 있지만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 좋아했던 전공을 포기할 만큼 연기의 매력은 대체 뭔가요.
"저로부터 시작되죠. 저를 더 탐구하고 알아가고 싶어서요. 연기는 제 삶의 과정이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성장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고 같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물어보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철학, 심리 책이나 MBTI도 찾아보고요."
▲ 영화 <만분의 일초> 스틸컷 |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
-태수는 비극을 품은 가해자지만 자세한 전사가 없어서 궁금해지는 캐릭터였습니다. 호면을 쓰고 있고 대사도 적고 눈빛으로만 접근해야 했을 텐데요.
"감독님은 태수를 서사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재우의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악의적이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상태요. 그래서 저만의 서사를 쌓았는데요. '태수는 과거의 비극을 벗어나기 위한 인물이다' 나라면 어떻게 생활하고 대할까 고민했죠. 그 결과 뭘 하는 역할보다는 비워내는 역할이라 생각했어요. 검도의 인간화인 셈이죠. 추운 겨울이든, 밤이든, 혼자 야외에서 수련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웃음)."
-검도 1인자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장면도 많습니다. 재우 입장에서는 악인으로 비치는데 또 그렇지만은 않은 복잡한 인물이에요. 재우처럼 모르는 사람이 계속 들이대면 대체 왜 그런지 물어볼 것 같은데 차분하게 대응하더라고요.
"재우가 트라우마를 트리거로 터트리면 태수는 그걸 받아주지 않고 벽처럼 튕겨 내요. 친절하지 않죠. 태수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누군가가 신경질 부려도 개의치 않는 것도 있어요. 그저 목표만 추구하는 극단적인 구도자의 자세를 추구합니다. 너무 인간적이지 않아서 영화 속에만 있는 인물이에요.
그 부분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는데요. 항상 강하게만 보이면 입체적이지 않을 거라 약한 모습, 소년미도 집어넣었습니다. 가족과 통화하는 장면이랑 사범님의 두건을 잃어버리는 장면에서 약간 숨통이 트여요. 소중히 지켜왔던 게 없어지고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태수를 보여줘요. 나중에 재우와 화해하면서 나름의 따스한 부분이 생기도록 작은 디테일을 넣기도 했어요. 그 미묘한 선이 감독님의 세심한 디렉팅에 의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편집본을 보니까 놀라웠고 감독님과는 개념이 다르다는 걸 실감했죠."
-가장 애정 하는 장면이나 힘들었던 장면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누가 봐도 국가대표 선수처럼 늘 보여야 했던 거요. 호면을 받고 하나하나 풀 때요. 동작이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과하지 않고 어색하면 안 되었기에 등장 신이 제일 어려웠어요. 서 있는 자세, 호흡도 중요했고요. 혼자 밖에서 도인처럼(?) 훈련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요. 굳이 추운데 밖에서 왜 저러나 싶었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구도자의 느낌 아닐까 상상하면서 찍었던 기억이 있네요."
"<만분의 일초>는 <모범가족>을 찍고 바로 찍었던 작품이에요. 예전에 드라마 때문에 검술을 배운 적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외적으로는 날렵한 태수를 생각했는데 감독님은 살집이 있는 풍채를 원하셔서 (살을) 찌웠습니다. 감독님이 검도를 하셔서 조사도 많이 하신 거로 알아요. 무술 감독님 자문, 국가대표 분들 자문도 들어가 캐릭터가 완성되었습니다."
▲ 영화 <만분의 일초> 문진승 배우 |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
-합숙하면서 검도를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실제 검도를 배워보니 어떻던가요?
"검도관에서 저 포함 4명(주종혁, 장준휘, 김용석)이 기초부터 배웠어요. 못하니까 더 친해지게 되었죠. 용인대에서는 합숙하면서 전담으로 한 명씩 배웠는데요. 그때 어렴풋이 검도인의 생활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도의 매력은 '기세'죠.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고나 할까요? <달이 뜨는 강> 때문에 검술도 배웠는데요. 검술은 무용같이 연기했는데 검도는 무예의 성격이 강하더라고요. 검도는 특히 마음가짐이 중요하더라고요."
- 영화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2관왕을 차지했는데요. 해외 영화제에서도 호평받고요. 그래도 중요한 건 관객의 반응이지 싶어요. 인상적이었던 후기가 있었나요.
"'힐링 되었다. 고맙다'는 말을 해주시더라고요. 같은 걸 봐도 받아들이는 게 다른데, 그게 영화의 매력같아요. 또 어떤 분은 '시합이잖아 잊어!'라는 대사가 와 닿았다고 하더라고요. 무척 공감했습니다."
-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지,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비중을 따지기보다는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배우로서 일하고 싶어요. 대중에게는 좋은 배우로 각인되고 싶은데 좋은 배우란 진정성 있는 배우, 어떤 역할이든 어울리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라고 보거든요. '문진승, 참 스펙트럼 넓은 배우야'라는 말이 영광이지 싶어요. 제가 또 코미디 연기도 좋아하거든요. <그것만이 내 세상>이나 <내부자들>의 이병헌 선배가 맡은 코미디를 좋아해요. 로맨틱 코미디도 선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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