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와 인권탄압을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대통령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11. 1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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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이념이 충돌하는 산티아고에서

[김찬호 기자]

푼타 아레나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도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긴 비행이었습니다. 이제는 남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긴장되었습니다. 처음 리우로 향할 때 만큼이나 걱정이 앞서는 도시였습니다.

과거 칠레는 남미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치안 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최근에는 여행자 커뮤니티에서 자주 사건사고 소식이 들려오는 곳이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비행기
ⓒ Widerstand
물론 제가 방문한 주말의 산티아고는 걱정했던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안전한 교통수단만을 이용해 오갔기 때문이겠지만요.
광장에는 여행객과 현지인이 북적였습니다. 무장한 경찰이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멀리 안데스 산맥을 배경으로 코스타네라 센터가 보였습니다. 남아메리카 최고층 빌딩입니다.
물가도 많이 높아졌습니다. 화폐가치가 폭락한 아르헨티나에서 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물가는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게 느껴졌습니다. 도심의 마천루와 잘 정비된 거리, 그리고 높은 물가까지. 칠레가 남아메리카 경제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코스타네라 센터 안의 쇼핑몰
ⓒ Widerstand
칠레는 남미에서 돋보이는 경제 선진국입니다. 전체 GDP로도 남아메리카 5위 안에 들죠. 1인당 GDP는 우루과이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도나 청렴도도 높은 편입니다. 
이 같은 칠레의 경제적 성장은 지하자원에 기댄 면이 큽니다. 남부의 농업이나 넓은 해안선을 이용한 어업도 발달해 있지만, 수출의 절반 가까이는 구리 광산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1차산업 위주의 경제는 물론 불안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적인 원자재 가격의 변동에 국내 경제가 지나치게 큰 영향을 받게 되죠. 지하자원을 채굴해 빠르게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초기 투자가 필요한 산업자본의 성장도 정체됩니다. 지하자원 채굴권을 얻은 특정 계층에 부가 집중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사회적 불안정을 만들어 냅니다.
 
 칠레의 국기
ⓒ Widerstand
칠레가 겪어 온 역사가 바로 그랬습니다. 칠레는 스페인 식민지 가운데 안데스 서부 영토를 가지고 독립했습니다. 호세 데 산 마르틴과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칠레의 독립을 이끌었죠. 
한때는 지금의 아르헨티나 남부도 칠레의 땅이었지만, 그것은 아직 칠레라는 국가가 제대로 성립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 땅이 제대로 개발되기도 전이었고요.

오히려 칠레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독립 직후 볼리비아와 전쟁을 벌여 지하자원이 풍부한 영토를 빼앗아 왔죠. 볼리비아가 바다 없는 나라가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독립과 영토 확장 이후 칠레의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언급했듯 지하자원에 기반한 경제 성장은 정치적 불안을 초래했죠. 한동안 군사독재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산티아고의 거리
ⓒ Widerstand
이런 칠레 정치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인물이 있었습니다. 칠레의 32대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입니다. 아옌데는 칠레 정치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아옌데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당시 칠레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과는 거리를 뒀습니다. 혁명보다는 선거를 통해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죠. 우파 세력과의 연대도 지속해서 추진했습니다. 
1970년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시 칠레 공산당에서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대선 후보로 선출했지만, 네루다는 후보에서 사퇴하고 아옌데를 지지했습니다. 전례 없는 야권의 단결 아래에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아옌데는 칠레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언급했듯 칠레는 지하자원 위주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빈부 격차를 야기했습니다.

아옌데는 다국적 기업이 소유한 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거대 농장주의 토지 일부를 국유화하는 토지개혁도 실시했죠. 노동자 임금의 인상으로 중산층을 육성했고, 의료 보장 제도 등을 통해 보편적인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빈곤층을 위한 복지와 교육 정책도 이어졌습니다. 아옌데는 의사 출신으로, 과거 복지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이미 교육과 복지 정책의 개혁을 추진해 왔었죠.
 
 산티아고 기억과 인권 박물관
ⓒ Widerstand
하지만 아옌데의 개혁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급진적인 정책은 부유층과 다국적 기업의 반발을 불러왔죠. 미국의 닉슨 정부는 칠레를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칠레로 향하는 생필품과 의약품조차 통제되기 시작했죠. 
이러한 조치에도 칠레 내에서 아옌데에 대한 지지는 식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은 최후의 방법을 동원했죠. 1973년 9월 11일, CIA의 지원을 받은 육군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쿠데타 세력은 곧 산티아고를 장악했죠. 아옌데는 항전 끝에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칠레 정치사의 한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대규모의 공기업 매각과 시장 개방을 단행했습니다.

여기에 미국의 지원이 더해지며 칠레 경제가 호황을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칠레의 물가는 폭등했고, 불평등은 심화됐습니다. 다국적 기업의 진출로 국내 산업 자본의 성장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죠.

무엇보다 피노체트 세력은 악명 높은 독재정을 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군부 정권이 들어선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 함께 '콘도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반정부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 나섰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칠레의 인권 탄압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국민이 정치적 이유로 해외 망명을 택하기까지 했습니다.
 
 독재정권의 희생자를 기리는 조형물
ⓒ Widerstand
결국 1980년대 말부터 칠레에는 민주화 요구가 점점 거세집니다. 심각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집회도 벌어지기 시작했죠. 남미 주변국의 독재정도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88년 피노체트는 정권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합니다. 칠레 국민들은 불신임을 택했습니다. 피노체트는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칠레는 다시 민주화의 시대를 맞게 되었죠.

하지만 피노체트 시대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습니다. 피노체트는 1998년까지 칠레군 총사령관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이후에는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했죠. 칠레 정부는 피노체트를 처벌하려 했지만, 절차는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결국 2006년에야 피노체트는 가택연금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그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사망했죠. 이미 그의 나이는 91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아르마스 광장의 국립박물관
ⓒ Widerstand
1973년, 피노체트 군부는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라디오 방송을 신호로 쿠데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문구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다룬 프랑스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죠. 
아옌데 정부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부였습니다. 반면 피노체트 정부는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부였죠. 두 이념은 민주화 이후 칠레에서도 내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칠레는 지금 그 두 이념 사이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피노체트의 독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만큼이나, 그 시절에 이룬 칠레의 경제 성장을 추억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칠레 국민들은 2021년 35세의 청년 좌파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추진한 진보적인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습니다. 두 이념의 충돌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경제적 위기는 심해졌고, 치안도 악화되었습니다. 칠레 국립박물관도 문을 닫았더군요. 직원들의 파업 때문이었습니다. 주말 도심 곳곳에는 정치 집회도 열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산티아고는 내내 맑았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두 노선의 갈등에서, 칠레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칠레 국민들의 몫이겠죠. 다만 이 도시에 다시 50년 전과 같은 비가 내리지는 않기를, 저는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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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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