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와 인권탄압을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대통령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푼타 아레나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도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긴 비행이었습니다. 이제는 남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긴장되었습니다. 처음 리우로 향할 때 만큼이나 걱정이 앞서는 도시였습니다.
▲ 산티아고로 향하는 비행기 |
ⓒ Widerstand |
광장에는 여행객과 현지인이 북적였습니다. 무장한 경찰이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멀리 안데스 산맥을 배경으로 코스타네라 센터가 보였습니다. 남아메리카 최고층 빌딩입니다.
▲ 코스타네라 센터 안의 쇼핑몰 |
ⓒ Widerstand |
이 같은 칠레의 경제적 성장은 지하자원에 기댄 면이 큽니다. 남부의 농업이나 넓은 해안선을 이용한 어업도 발달해 있지만, 수출의 절반 가까이는 구리 광산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1차산업 위주의 경제는 물론 불안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칠레의 국기 |
ⓒ Widerstand |
한때는 지금의 아르헨티나 남부도 칠레의 땅이었지만, 그것은 아직 칠레라는 국가가 제대로 성립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 땅이 제대로 개발되기도 전이었고요.
오히려 칠레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독립 직후 볼리비아와 전쟁을 벌여 지하자원이 풍부한 영토를 빼앗아 왔죠. 볼리비아가 바다 없는 나라가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 산티아고의 거리 |
ⓒ Widerstand |
1970년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시 칠레 공산당에서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대선 후보로 선출했지만, 네루다는 후보에서 사퇴하고 아옌데를 지지했습니다. 전례 없는 야권의 단결 아래에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아옌데는 칠레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언급했듯 칠레는 지하자원 위주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빈부 격차를 야기했습니다.
아옌데는 다국적 기업이 소유한 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거대 농장주의 토지 일부를 국유화하는 토지개혁도 실시했죠. 노동자 임금의 인상으로 중산층을 육성했고, 의료 보장 제도 등을 통해 보편적인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 산티아고 기억과 인권 박물관 |
ⓒ Widerstand |
이러한 조치에도 칠레 내에서 아옌데에 대한 지지는 식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은 최후의 방법을 동원했죠. 1973년 9월 11일, CIA의 지원을 받은 육군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쿠데타 세력은 곧 산티아고를 장악했죠. 아옌데는 항전 끝에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칠레 정치사의 한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대규모의 공기업 매각과 시장 개방을 단행했습니다.
여기에 미국의 지원이 더해지며 칠레 경제가 호황을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칠레의 물가는 폭등했고, 불평등은 심화됐습니다. 다국적 기업의 진출로 국내 산업 자본의 성장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죠.
무엇보다 피노체트 세력은 악명 높은 독재정을 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군부 정권이 들어선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 함께 '콘도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반정부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 나섰죠.
▲ 독재정권의 희생자를 기리는 조형물 |
ⓒ Widerstand |
결국 1988년 피노체트는 정권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합니다. 칠레 국민들은 불신임을 택했습니다. 피노체트는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칠레는 다시 민주화의 시대를 맞게 되었죠.
하지만 피노체트 시대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습니다. 피노체트는 1998년까지 칠레군 총사령관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이후에는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했죠. 칠레 정부는 피노체트를 처벌하려 했지만, 절차는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 아르마스 광장의 국립박물관 |
ⓒ Widerstand |
아옌데 정부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부였습니다. 반면 피노체트 정부는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부였죠. 두 이념은 민주화 이후 칠레에서도 내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칠레는 지금 그 두 이념 사이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피노체트의 독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만큼이나, 그 시절에 이룬 칠레의 경제 성장을 추억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칠레 국민들은 2021년 35세의 청년 좌파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추진한 진보적인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습니다. 두 이념의 충돌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경제적 위기는 심해졌고, 치안도 악화되었습니다. 칠레 국립박물관도 문을 닫았더군요. 직원들의 파업 때문이었습니다. 주말 도심 곳곳에는 정치 집회도 열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산티아고는 내내 맑았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두 노선의 갈등에서, 칠레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칠레 국민들의 몫이겠죠. 다만 이 도시에 다시 50년 전과 같은 비가 내리지는 않기를, 저는 바랄 뿐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인요한 수행실장은 서대문구청장 아들... 출마 사전 작업?
- "이런 적은 처음... 윤석열 대통령 초대하고 싶다"
- 20만원 수제구두 만들면 노동자 6500원, 사장님은?
- 꺼지지 않는 병립형 회귀설... 민주당, 계산 끝났나
- 향기 나는 혓바닥, 이걸로 다 됩니다
- '이준석 신당' 0석에서 50석, 왜 무의미한가
- 검찰총장 비서실로 옮겨진 현금 50억... 비밀리에 잔액관리
- 신문윤리위, 김만배 인터뷰가 '대선 공작'이라는 조선일보 제재
- 민주당, 총선 인재 '대국민 추천' 받아 뽑는다
- 내 나이 70,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로 TV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