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말에서 찾은 정치할 이유

허형식 2023. 11. 1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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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인미 지음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 을 읽고

[허형식 기자]

"그러니까 네가 OOO을 찍었다고?"

2012년 겨울, 고등학교 동창 대여섯 명과 함께하는 송년회 자리였다. 20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그 친구의 정치적 성향은 알 수 없었는데, 선거에서 OOO을 찍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온몸의 피가 머리에 쏠리는 기분이었다. 이후 그 모임엔 나가지 않게 됐다.

그때부터였을까. 필자는 팟캐스트, 유튜브 채널에서 정치 채널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내 편 네 편 할 거 없이 거칠게 쏟아내는 말들에 질렸기 때문이지만, 나도 모르게 나의 내면에서 정치가 혐오의 대상이 됐기 때문일 수 있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은 나처럼 정치 혐오에 빠진 독자를 향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외로운 사람'일까? 무슨 이유로 외로움과 정치가 만났을까? 나는 외롭지 않으니 정치가 필요 없나?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이 책의 저자인 성공회대 연구교수 이인미 저자를 소환해야 한다.

여성단체 간사,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의 연구실장 등의 일을 하며 평생 환경과 시민운동에 전념해온 이인미는 외로움이 '매일매일의 경험'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대중사회가 위험하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무역, 군사, 인권, 환경 등 온갖 분야에서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시대를 살고 있다. (중략) 때로는 집 안에 틀어박혀 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내고, 때로는 모임에 나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내심 어색해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성질을 부린다. 그럴 때면 "분노 조절이 좀 안 되어서요"라고 해명하기 바쁘다. 유령 같은 외로움이 우리 곁을 배회하는 것 같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 8쪽
 
이 지점에서 이인미는 한나 아렌트를 찾는다. 아렌트는 1950년대 초에 외로움의 문제를 정치의 차원에서 성찰한 정치사상가이며, 외로움의 문제를 무려 '비非전체주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 지도자를 맞이할 자세를 갖추게 되는' 계기로 풀이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입문서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된 아렌트의 저서 열여섯 권 중 열다섯 권을 소개하되, 우리 사회에서 포착되는 문제들을 다섯 가지(인간, 정치, 공동체, 이해, 세계)로 분류하고 그 문제들에 접근할 때에 읽으면 좋을 아렌트의 저서들을 소개하는 방법을 택한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 표지
ⓒ 위즈덤하우스
 
우선, 목차 몇 가지만 봐도 정신이 번쩍 든다. '정치에도 연습이 필요해', '자유민주주의? 자유가 무엇인지부터 말하라', '답정너 사회의 전체주의', '전체주의의 세 가지 요인' 등의 제목은 지금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중 '전체주의의 세 가지 요인'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렌트에 따르면, 어느 정권이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요인이 필요하다. 첫 번째 요인은 정권의 통치 형식이 테러(공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겁을 줘 통치하는 것. 두 번째 요인은 지도자의 특징인데, 전체주의의 지도력의 비밀은 바로 '조직'이다. 조직 안에는 내부가 있고, 그 안에 또다시 내부가 있는 '양파형 구조'로 구성되며 내부자 간에는 엄격한 서열 또한 존재한다.

조직에 '완전히 입문'한 사람들이 A를 추진하면, '반쯤 입문'한 사람들이 A를 뒷받침하며, '장차 입문'할 사람들이 A를 널리 퍼뜨린다. 다수의 사람이 조직적 실천에 연루되니 A라는 정책은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퍼진다. "하지만 세상천지에 무오류의 인간은 없다. 무오류의 조직도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검찰 조직의 무오류를 확신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그건 위험한 믿음"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세 번째 요인은 '폭민mob'이다. 아렌트는 폭민을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로 고립된 사람, 개인적 실패를 특정한 사회적 불의의 관점에서 재정리하며 세계를 단순하게 판단하는 사람으로 풀이한다. "폭민은 정치 자체에 냉담한데,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대상이 나타나면 한껏 흥분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강력하게 떠드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무리 지어 달려가 목소리를 더할 채비를 갖춘 '다수의 성난 개인들'이다." 20세기 후반을 살았던 아렌트의 얘기지만, 왠지 지금의 한국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 같다.

결국 저자가 아렌트를 통해 말하고 싶은 '정치 수업'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닌 '정치의 회복'이다. 정치가 "선거운동, 공천, 투표, 자금, 정쟁 그리고 정권 창출을 위한 다툼이나 국회에서 고성이 오가는 장면"을 넘지 못해 혐오의 대상으로 머무를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국민 스스로 정치를 포기할 때, 제아무리 투표로 선출된 정권이라 할지라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폭민을 동원하고, 조직 무오류성을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지도자가 때마침 등장한다면 한 사회가 과거로 되돌아가는 건 일순간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란 '평등하고 주체적인 개인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뜻을 모으는 일상의 모든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위야말로 인간 고유의 특징이며, 이러한 정치가 회복될 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므로 책은 '정치 수업'을 표방한다.

이런 이유라면 기꺼이 정치를 하고 싶다. "설득력 있게 내 의견을 발언하고, 신중하게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니, 정치는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고 모든 가정 안에도 뿌리내려야 할 어떤 것이다.

나도 그때, 그 선거 이야기를 멀리하지 않고 친구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듣고 또 내 의견을 소신껏 얘기했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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