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움 일기를 쓰는 이유

김초혜 2023. 11. 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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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때 비울 수 있는 것들.

미니멀리즘이 최신 유행처럼 널리 퍼졌을 때였다. 큰맘 먹고 대청소를 하며 집 안의 물건을 싹 버렸다. 마법처럼 깔끔해진 집에서 뿌듯한 마음이 지속됐던 건 딱 하루나 이틀 정도. 내게 새로 생긴 미션은 새로 사야 할 물건이 적힌 쇼핑 리스트뿐이었다. 차가운 실패를 맛본 내가 다시 한 번 비움에 도전하게 된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공부하는 거실 테이블 위로 흩뿌려져 있던 잡동사니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첫째가 오롯이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해졌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오늘은 안방 옷장을, 내일은 거실 주방 서랍장을 하나씩 비워가며 순차적으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비움을 실천하면서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건 ‘버려도 될까?’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다잡는 일이다. 다 읽은 책은 지인에게 나눠주고, 쉽게 버리기 어려운 물건은 박스에 모았다. 박스 속 물건들을 충분히 지켜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쓰이지 않는 물건은 과감하게 처분했다. 예전에는 좋아했던 옷, 남편에게 선물받은 가방…. 추억이 깃들어 있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물건에 얽힌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말끔한 공간에서 버퍼링 없이 흘러가는 의식주는 내게 창의적인 생각을 가져다준다.

일주일에 한 번 기록하기 시작한 비움 일지에는 물건을 버리면서 마주한 단상들이 적혀 있다. 선글라스나 가위처럼 같은 용도의 물건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 의식하게 될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고 있다. 나누고, 팔고, 버리면서 우리 집을 거쳐간 수많은 물건을 떠올리면 대부분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얼마나 많은 짐을 떠안고 살았는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분명 비우기 시작할 때는 수많은 번뇌가 찾아왔었는데, 뒤돌아서면 전혀 생각나지도 않는 물건을 소중한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니.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비움을 오롯이 마주한 느긋한 주말 오후, 인간미 넘치게 어지러운 집도 10분이면 말끔하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가까운 이들이 불쑥 집에 찾아오는 일도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다. 내가 가진 물건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이를 정확하게 관리하면서 사는 삶은 분명 높은 자존감과도 직결돼 있다.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진 우리 집 물건에는 각각 놓이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 언젠가는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의 위치가 건축 도면처럼 쫙 펼쳐지듯 그려졌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뒤엉킨 물건을 비워낸 자리에 새로운 삶을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이 깃든다.

한르메

디자이너로 일하다 현재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고 있다. 부지런히 비움 라이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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