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공인 ‘축잘알’… “모르면 배우는 게 해설 철칙”
일상을 축구로 가득 채워 사는 그에게도 아직 축구의 세계는 모르는 것 천지다. 활동 반경을 더 넓히면서부터는 새로 입력해야 할 정보도 많아졌다. "이제는 도전 의식보다는 피로가 더 앞선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다가도 축구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는 한 위원을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무언가에 대해 ‘떠들기’를 좋아했어요”
자연과학 전공자에서 철학 전공자로, 다시 스포츠 전문가로 옮아온 자신의 생애를 한 위원은 이 한 줄로 정리했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 대상만큼이나 그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뭐가 됐든 상관 없었다. 업으로 삼게 된 축구 말고도 한 위원의 관심사는 매우 다양하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어떤 키워드를 던지기만 하면 멘트가 줄줄 나오는 이유다.
“어려서부터 정말 많은 경기를 봤어요. 많은 팀 선수들을 접하다 보니 그게 쌓이면서 역사적 흐름을 보게 되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오면서 살았어요. 그러면 자동적으로 할 말이 많아지는 거예요.”
“급하게 욱여 넣은 지식은 오래 못 가요. 툭 치면 말이 나올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어떤 분야가 됐든 외우는 게 아니라 그걸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체득을 하면 돼요.”
그래서인지 그에게 제일 뿌리 깊게 박혀있는 정체성 역시 해설위원이다. 쉴 틈 없는 일상을 지내는 가운데에도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밀도 있는 해설의 비결은 그간 한 위원이 지켜온 확고한 철칙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제일 나쁜 해설로 꼽는 건 ‘거짓말 해설’이다. 한 위원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거나 대충 아는 것을 정확하게 안다고 하는 것만큼 나쁜 게 없다”며 “모르면서 아는 척을 많이 하면 해설에도 그게 배어 나온다”고 경계했다.
중계를 대충 준비하는 법도 없다. 그는 “경기를 중요도에 따라 갈라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가장 직전에 했던 경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경기는 바로 다음에 할 경기”라고 말했다.
올해는 유독 새롭게 벌린 일들이 많다. 한 위원은 지난해 12월 무려 18년간 몸 담았던 KBS를 떠나 올해부터 쿠팡플레이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다. 지상파 스포츠계를 주름잡던 터줏대감이 적을 옮기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한 위원은 “지상파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다”며 “스포츠의 미래도 OTT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스포츠 칼럼 팟캐스트로 시작해 10년 넘게 진행 중인 ‘원투펀치’ 콘텐츠를 올해 들어 자립 유튜브로 전환해 기획, 출연, 운영까지 책임지고 있다.
뉴미디어 세계에 발을 들이고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볼 경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K리그는 물론이고 스페인 라리가, 프랑스 리그1, 독일 분데스리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부리그 등 유럽 전역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물론 해외 축구에 해박한 한 위원이지만 그 역시 모르는 게 없지는 않다. 한 위원은 “이번에 황의조 선수 중계도 맡게 됐는데, 사실 노리치 경기는 별로 안 봤다”며 “생소한 팀의 경기가 있으면 당연히 다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축구 선수들의 해외 리그 진출 소식이 반갑긴 하지만, 해설 위원의 입장에선 그 만큼 중계 준비에 들일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난 5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나서도 매일이 도전의 연속이다. 직무를 수행한 지 아직 반년이 채 안 됐지만 벌써 굵직한 프로젝트에 손을 대고 있다. 곧 발족할 e풋볼위원회에선 초대위원장을 맡아 축구 게임 산업에 관심을 쏟고 있고, 동시에 한국 프로축구 디비전 시스템의 확대 발전 방향도 논의하고 있다.
무엇보다 부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축구 팬들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한 위원은 “한국 축구에 대한 여론이나 쓴소리를 협회에 전달하려는 소명 의식이 있었다”며 “당초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최근 축구 팬들 사이에선 위르겐 클린스만 남자 A대표팀 감독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크다는 점을 그 역시 인지하고 있다. 한 위원은 “클린스만 감독의 행보나 경기 내용, 결과에 대해서는 대한축구협회도 엄정하게 평가를 한다”며 “내부에서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달엔 클린스만호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예선 경기가 줄지어 잡혀 있다. 한 위원 역시 축구 평론가로서, 협회 관계자로서 경기를 꼼꼼히 뜯어볼 예정이다. 한 위원은 “이제부터는 평가전이 아니다”며 “아무리 싱가포르, 중국과 한국이 전력 차이가 나더라도 월드컵 지역 예선인 만큼 한 번이라도 미끄러지면 한국 축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전이 중요하다. 유럽 무대를 경험해본 적 있는 우레이 등 한국 진영에 순간적으로 타격을 입힐 만한 선수가 포진해 있고, 2017년 FIFA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때엔 0대 1로 충격패를 당했던 나쁜 기억도 있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되는 데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던 패배였다. 한 위원은 “중국전은 원정 경기이기도 해서 상대가 아주 끈끈하고 거칠게 나올 것”이라며 “중국이 분명 ‘딸깍’ 한 골을 노릴 텐데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고 짚었다.
베테랑 해설 위원의 시야에 눈앞의 것만 담길 리 없다. 아직은 멀게 느껴지지만 한국 축구의 ‘숙원’으로 꼽히는 내년 아시안컵 우승과 3년 뒤 펼쳐질 월드컵까지도 바라봐야 한다. 현재 남자 A대표팀은 이른바 ‘황금 세대’로 불린다. 손흥민(31·토트넘), 김민재(27·바이에른 뮌헨), 이강인(22·파리 생제르맹) 등 이름난 축구 스타를 포함해 해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명단의 70% 이상을 채우고 있다. 2002월드컵에서 거둔 4강 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정 대회에선 최고 성적을 낼 절호의 기회다.
한 위원은 2026 북중미월드컵에서 대표팀이 펼칠 활약 가운데 가장 기대되는 것으로 주장 손흥민의 ‘라스트 댄스’를 꼽았다. 그는 “2026년엔 연령으로만 보면 김민재, 이강인이 고점을 달리고 있을 것”이라면서도 “요즘 토트넘에서 중앙으로 옮겨 활약하고 있는데 이 추세를 유지해 손흥민이 마지막으로 월드컵을 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며 웃어보였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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