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회에 어울리는 와인은 따로 있다

임승수 2023. 11. 1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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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음식을 만나는 순간] 돌돔회를 두고 벌인 화이트 와인 배틀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임승수 기자]

미식가 자식을 둔 부모는 고충이 크다. 맛에 나름의 취향이 생긴 아이 모습이 기특할 텐데 무슨 고충이냐고? 한번은 강원도 해변으로 가족 여행을 갔는데 배가 고파서 근처 횟집에 들어갔다. 관광지이다 보니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저렴한 양식 회를 주문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한 점 씹어대던 미식가 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아빠. 이 회는 왜 맛이 없어?"
"그래? 예전에 먹었던 회가 더 맛있었나 봐?"
"응. 그거랑 비교가 안 되네."

아이가 예전에 먹었던 건 자연산 돌돔인데 아마도 회는 다 그런 맛이 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미안하구나. 돌돔은 우리 형편에 눈 질끈 감고 만용을 부려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다.

얼마 전 양식 돌돔회에다가 낙지회를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자기가 세뱃돈 모아놓은 걸 줄 테니 돌돔회를 시켜달라는 딸내미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이도 먹을 거라 좀 얇게 썰어달라고 메모를 남겼는데, 누가 봐도 정성스럽다고 할 정도로 얇고 가지런히 썰려왔다. 아이 얘기에 더욱 신경을 쓴 것이겠지.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새 육고기든 물고기든 와인 없이 섭취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회에 어울리는 와인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프랑스 샤블리가 괜찮을 것 같은데. 음, 스페인 알바리뇨도 해산물과 잘 어울리잖아. 맞다! 이탈리아 소아베가 좋지 않을까?

그렇게 뭘 마실지 고민하다가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유럽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벌여보자.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이탈리아의 유벤투스가 경쟁하듯 해산물과 잘 어울리기로 소문난 각 나라 와인이 대결을 벌이는 게지. 사적인 음주 생활마저 활자화 해야 생계가 유지되는 작가로서 유레카를 외칠 만한 글감 아닌가.

그런 연유로 동반 등판하게 된 와인은 다음과 같다.

[스페인] 파밀리아 토레스 파소 다스 브룩사스 알바리뇨 2019(3만 원, 현대백화점 구입)
[이탈리아] 피에로판 소아베 클라시코 2021(3만 원대 중반, 빅보틀 구입)
[프랑스] 루이 자도 샤블리 2021(4만 원대 초반, 이마트 구입)

유럽 화이트 와인의 면면들
 
▲ 회와 잘 어울리는 세 와인 왼쪽부터 순서대로 알바리뇨, 소아베, 샤블리이다.
ⓒ 임승수
 
일단 몸값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데다가 생산자들마저도 파밀리아 토레스, 피에로판, 루이 자도 등 이름값이 있어서 흥미로운 경쟁이 예상되었다. 심판으로 나선 아내와 나는 세 와인을 회에 곁들여 차례로 마시면서 소감을 나눴다.

일단 셋 모두 회와 아주 잘 어울렸다. 가벼운 바디감에 상큼한 신맛의 드라이 화이트와인이라는 공통된 특징은 해산물에 어울리는 와인의 필요조건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셋 중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해산물과 실패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승자와 패자를 가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와 아내가 세 와인을 차례차례 마시고 나눈 평가, 그리고 공식 홈페이지에서 얻은 와인 정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파밀리아 토레스 파소 다스 브룩사스 알바리뇨 2019]
알바리뇨 품종 100%. 코에서는 스모키 향, 감귤 향 등이 제법 강하게 감지되고 입에서는 신선한 신맛과 더불어 기분 좋은 짠맛이 감지됨. 젊은 생명력이 느껴짐.

공식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두 시간의 스킨 컨택(포도 껍질과 포도즙을 함께 숙성하는 것) 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16일 동안 알코올 발효를 진행했다고 함. 그 외에 숙성 정보는 없음. 제조 방식을 살펴보니 이 와인의 원초적인 상큼발랄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었음.

[피에로판 소아베 클라시코 2021]
가르가네가 품종 85%에 트레비아노 디 소아베 품종 15% 비율로 섞음. 앞선 알바리뇨가 에너지 넘치는 이십 대 초반 같다면 이 녀석은 상대적으로 차분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삼십 대 중반의 느낌. 섬세하고 세련되며 우아함. 맛과 향의 밸런스가 훌륭하며 잘 만든 작품 같음.

공식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포도 줄기를 제거하고 과육 분쇄 후 유리로 코팅된 시멘트 탱크에서 프리런 주스(강제로 압력을 가해서 짜는 형태가 아닌 자체 무게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과즙)를 발효한 후 3~8개월의 리숙성(효모앙금숙성)을 거친다고 함. 세심하고 정성스러운 제조 공정에서 이 와인 특유의 차분하고 섬세한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었음.

[루이 자도 샤블리 2021]
샤르도네 품종 100%. 다소 부담스러운 오줌 빛깔(아내의 표현). 코에서는 시큼한 향이 깔린 은은한 삼나무 향이 매력적이고 입에서는 바닷물 느낌의 신선한 짠맛이 인상적.

공식 홈페이지의 정보에서는 과실 느낌과 신선함을 살리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 및 숙성을 진행했다고 함. 하지만 나와 아내 모두 오크통 숙성 와인 특유의 바닐라 뉘앙스와 스모키 향을 감지함. 와인의 풍미를 풍부하고 두텁게 만들기 위해 오크통을 살짝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됨.
 
▲ 돌돔회와 낙지회, 그리고 세 와인 가벼운 바디감에 상큼한 신맛의 드라이 화이트와인이라는 공통된 특징은 해산물에 어울리는 와인의 필요조건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 임승수
 
방구석 와인 배틀의 최종 승자

이렇게 세 와인이 구강이라는 운동장 안에서 각각의 선수 구성과 전술로 한판 대결을 벌였다. 다들 훌륭한 와인이라서 기량이 그야말로 한끗 차이지만 어쨌든 나와 아내가 심사숙고하여 매긴 순위는 다음과 같다.

아내
1위 피에로판 소아베 클라시코 2021
2위 파밀리아 토레스 파소 다스 브룩사스 알바리뇨 2019
3위 루이 자도 샤블리 2021


1위 피에로판 소아베 클라시코 2021
공동 2위 루이 자도 샤블리 2021
공동 2위 파밀리아 토레스 파소 다스 브룩사스 알바리뇨 2019

아내와 나 모두 피에로판 소아베 클라시코를 1위로 꼽은 이유는 맛과 향의 밸런스 및 완성도에서 다른 두 와인보다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루이 자도 샤블리를 3위로 꼽았다. 느끼한 오크 뉘앙스 때문에 담백한 횟감의 풍미가 다소 가려진다는 것이다. 2위는 상큼함과 신선함이 도드라지는 알바리뇨. 나는 아내보다는 오크 뉘앙스에 거부감이 작다 보니 샤블리와 알바리뇨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공동 2위를 주었다.

이번 대회는 만장일치로 이탈리아의 승리! 피에로판이 만드는 소아베 와인이 탁월하다는 풍월은 예전부터 들었지만 직접 경험하니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큼하고 신선한 화이트와인을 선호하는 애호가라면 무조건 마음에 들 것이다.
 
▲ 피에로판 소아베 클라시코 공식 홈페이지의 자료를 살펴보니 이 와인 특유의 차분하고 섬세한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 Pieropan
 
결판은 났으니 이제 남은 건 와인과 음식을 즐기는 일 뿐! 2위, 3위 와인 남은 것은 작은 스윙보틀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고 본격적으로 돌돔회와 피에로판 소아베 클라시코의 콜라보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밸런스가 마음에 드네

역시 돌돔회! 상당히 얇게 썰었음에도 탄력을 잃지 않는다. 길게 썰린 한 점을 젓가락으로 훅 집어 들면 육질의 탱글탱글함으로 인해 회 양쪽 끝이 위아래도 파르르 진동한다. 미쳤다. 입 안에 넣고 씹으면 졸깃함과 담백함, 그리고 감칠맛이 최고의 조합으로 이뤄내는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짜지도 달지도 맵지도 않은 음식이 이렇게나 맛있을 수가 있다니. 이건 사기다.

이제 와인 차례다. 스월링 후 잔에 고인 향을 한껏 들이키니 한창 대결을 벌이던 때에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은은한 꽃향기가 피어오른다. 한 모금 들이켜 구강 안에서의 느낌을 음미하는데, 대리석을 둥근 구 형태로 예쁘게 깎아 놓은 듯 완벽한 밸런스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불현듯 머릿속에서 바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운전해서 몇 시간 안에 가닿을 수 있는 바닷물 말고 모랫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의 청순하디 청순한 바닷물 말이다. 돌돔에게도 이런 바닷물이라면 극락왕생 아니겠나. 가보고 하는 얘기냐고? 당신도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

글 본새에서 눈치챘겠지만, 세 와인을 번갈아 마셨던 후폭풍인지 제법 취기가 오른다. 혈중알코올농도 증가 때문인지 아내는 세 와인을 뒤섞어놔도 블라인드로 구분할 수 있다며 갑자기 호기를 부린다. 나 또한 그런 아내가 자랑스러워서 오래간만에 업어주겠다고 등을 디밀었다.

연애 시절부터 업히는 걸 좋아한 아내는 냉큼 달려들더니 등 위에 얹혀 까르르 웃어젖힌다. 여기가 바로 뉴칼레도니아구나. 곧이어 초등학생 둘째도 업어주었으나, 중학생 첫째는 사춘기라 그런지 업히기를 거부한다. 살짝 서운하다만 아빠도 그 시기를 지나온 만큼 충분히 이해한다.

그나저나 피에로판 가문 사람들은 자신들의 와인이 대한민국 서울 금천구 독산동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챔피언스 리그 대회에서 쟁쟁한 경쟁자를 꺾고 우승한 사실을 아직 모르겠구나. 이 글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보여주면 좋아하려나. 그래! 번역기를 이용해 알코올 기운 가득한 이메일 한번 보내봐야쓰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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