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일에 동원된 인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조선경국전> |
ⓒ 문화재청 |
조선왕조 설계자인 정도전은 법전인 <조선경국전>에서 "요임금·순임금 시대에는 군주와 신하가 모두 성자였다", "우왕·탕왕·문왕·무왕 시대에는 임금과 신하가 모두 현자였다"고 칭송했다. 이런 인식은 조선시대 내내 유학자들에 의해 공유됐다.
조선시대에도 불교나 신선도(국선도) 등의 영향력이 상당했지만, 사회를 이끄는 유학자들이 요·순과 우왕·탕왕·문왕·무왕을 떠받들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위 6명 중 하나를 언급해야 무난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일본은 그런 분위기까지도 한국 지배에 활용됐다. 일본의 지배를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일에 이용했다. 여기에도 친일파들이 동원됐다. 유학자 정만조의 행적이 이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철종 임금 때인 1858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정만조는 고종 시절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우수한 선비들이 임명되는 요직을 거쳤던 것이다. 유교 이념을 많이 다루는 이런 관직을 역임했기 때문에, 그는 요·순 및 우·탕·문·무왕과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대한제국 멸망 5년 뒤인 1915년에 요시히토 일왕(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자 한시 한 수를 작성했다. 다이쇼(大正)란 연호를 사용해 다이쇼왕으로도 불리는 요시히토를 위해 그가 지은 시가 조선총독부 관계자들과 친일파 이완용·박제순·조중응 등이 만든 스터디 모임인 이문회(以文會)의 기관지에 실렸다.
<이문회지> 제3집에 수록된 이 시는 "흰 깃발 선명하게 휘날리며/ 해는 바야흐로 중천에 뜨고/ 불복종을 생각하는 자 없이/ 사방이 한 데 모인다"로 시작한다. 그런 뒤 이렇게 이어진다.
등극하여 황상의 자리에 계시면서
선왕을 잊지 않으시고
무(武)를 계승해 이를 받으셨으니
드러나지 아니할까 그 빛이
이에 사방을 돌아보시고
이곳 호경에 터를 닦으시며
위엄 있는 거동이 때에 맞으시니
이에 그 이루어짐을 보도다
전범 히로히토의 아버지인 요시히토의 즉위를 "호경에 터를 닦으시고(宅是鎬京)"라고 표현했다. 오늘날의 산시성 시안(서안) 쪽인 호경에 도읍을 둔 주나라 무왕의 업적을 요시히토의 즉위에 빗댔던 것이다.
"이곳 호경에"의 세 줄 위에 "무를 계승해 이를 받으셨으니(嗣武受之)"라는 구절이 있다. 독자들이 이 시의 주인공을 무왕(武王)과 쉽게 비교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존경했던 무왕의 이미지를 차용해 일왕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자료사진. |
ⓒ 연합뉴스 |
음서라는 특별채용을 거치거나 과거시험 소과를 통과해 생원이나 진사가 돼도 상당 수준의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경력을 쌓은 뒤 대과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1883년 당시의 정만조도 대과 급제자가 아니었다. 그가 대과에 상당하는 알성시에 급제한 것은 31세 때인 1889년이다. 그 뒤 내무부 주사를 거쳐 홍문관·사간원 관직 같은 엘리트 요직을 받게 됐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는 청일전쟁 2년 뒤에 화를 입었다. 37세 때인 1896년에 유배형을 선고받고 전라도 진도로 압송됐다. 양력으로 고종 33년 4월 18일 자 <고종실록>은 그에게 15년 유배형이 선고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날 내려진 고종의 왕명에 따르면, 그의 죄목은 1895년 을미사변 및 춘생문사건 연루였다.
정만조는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사건과, 이 사건 뒤 공포에 떠는 고종을 구하고자 친위세력이 경복궁 춘생문을 넘어 임금을 빼내려다 실패한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에게 유배형이 내려진 1896년 4월 18일은 두 달 전인 2월 11일의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해 이 나라의 도움을 받게 된 뒤였다.
을미사변과 춘생문사건 때만 해도 강력했던 일본의 영향력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급격히 떨어졌다. 이때부터는 고종의 신병을 장악한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졌다. 그러자 을미사변과 춘생문사건 때 고종의 반대편에 섰다고 간주된 사람들이 처벌을 받게 됐던 것이다.
홍문관 부교리로 근무하던 정만조는 1895년 4월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궁내부대신의 비서관이 됐다. 그해 10월의 을미사변 당일에는 궁내부 관제조사위원이 됐다. 이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건과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기도 쉬웠던 것이다.
그런데 국문학자 박명희의 논문 '무정 정만조의 진도 유배 시에 나타난 현지인과의 교유와 그 의의'에 따르면, 정만조는 자신이 혐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2020년에 발행된 <동방한문학> 제82집에 수록된 이 논문을 보면, 정만조가 체포 당시의 심경을 서술한 시에서 "응당 스스로 알 수 없는 죄명을 재촉"당했다고 술회했음을 알 수 있다.
정만조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시에 썼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지만, 두 사건의 피해자인 고종과 그 측근들의 눈에는 궁내부 직원인 그가 의심스럽고 못마땅하게 비쳐질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궁내부 직원의 본분을 다해 고종을 열심히 도왔다면 유배형까지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 |
ⓒ 이아림 |
복권되자마자 정만조는 새로운 후원자를 얻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만조 편은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대동학회의 평의원과 감사를 겸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이토의 후원을 받은 뒤에 그는 규장각 직각으로 근무하게 됐다.
고종이 이토에 의해 끌어내려지자마자 이토의 후원을 받았다. 고종에 대한 정만조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인 신하라면 이런 상황에서 이토의 후원을 받는 일이 꺼려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꺼이 받았다는 것은 신하의 의리 같은 것에 개의치 않을 정도로 고종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1년간의 유배 생활이 그의 친일 행보에 큰 영향을 줬으리라 볼 수 있다.
대한제국 멸망 1년 전인 1909년에 그는 일본 시찰을 다녀왔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일본을 돌아본 그는 관광 소감으로 "그 지휘·보호의 불가불복종"을 거론했다. 일본의 지휘와 보호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소감으로 남긴 그는 그해에 정3품 규장각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의 국권침탈 뒤에도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옛 성균관인 경학원의 대제학도 되고 경학원 부설기관인 명륜학원의 총재도 됐다. 일제강점기 유교 교육의 중심인물이 된 것이다.
한국 황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일제는 짓궂은 역할을 맡겼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당시에는 궁내부의 잔무 처리를 그에게 맡겼고, 요시히토 일왕을 무왕에 비유하는 시를 쓴 1915년에는 한국 황실의 제사와 종묘를 담당하는 역할을 그에게 맡겼다. 좋은 감정으로 제사 지내줄 수 없는 사람에게 제사를 맡겼던 것이다.
정만조는 대한제국 멸망 시점부터 1936년 사망 시점까지 일제의 녹봉을 받았다. 일제강점으로부터 26년 동안이나 친일 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이 외에 일왕이 주는 상장도 많이 받았다. 한국병합기념장, 요시히토 및 히로히토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훈6등 서보장,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그는 유교 이념을 굴절시켜 일본 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군신앙과 천도교 신앙까지 친일 도구로 활용했다. 1931년에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이 되고, 1934년에는 천도교인들이 만든 시중회의 평의원이 됐다. 한국인의 사상과 관념을 이용해 일본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종교의 벽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일본의 영향력 강화에 이용하는 모습은 윤석열 정권 출범 뒤에도 있었다. 강제징용에 관한 전범기업들의 책임을 은폐하고 한국 정부에 전가하기 위한 '제3자 변제 방안'을 관철시킬 목적으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운운하며 한일관계를 그 시절로 되돌리자는 선전전으로 한국 여론을 교란시켰다.
2023년 지금의 한일관계는 김대중 집권기가 아닌 박정희 집권기와 유사하다. 기시다 내각이 윤 정권을 움직여 복원시킨 것은 1965넌 당시의 한일관계다. 그렇게 할 계획이면서도 김대중을 운운한 것은 제3자변제를 반대하는 한국인들이 대체적으로 김대중을 존경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일제강점기 때도 당시의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주나라 무왕 등을 식민지배에 이용하는 양상이 전개됐다.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유학자 정만조가 이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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