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 시작은 동아일보 지키기
[장신기 기자]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최근에 공개한 1975년 4월 19일 씨알의소리 창간5주년 김대중의 특별강연 음성 자료에는 그의 대표적인 어록인 '행동하는 양심'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이는 김대중의 육성자료로서 '행동하는 양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최초의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행동하는 양심'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과 함께 김대중의 가장 유명한 어록이며 정치가로서 그의 삶과 태도를 대표한다. 또한 이 어록은 '인동초'와 함께 그를 상징하는 별칭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그의 호인 '후광'에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행동하는 양심'과 '인동초'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 2009년 6월 2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 30여 명과 자택 부근의 한 식당에서 오찬을 하면서 한 말 |
ⓒ 오마이뉴스 그래픽 |
이러한 특성과 배경을 갖고 있는 '행동하는 양심'을 김대중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이다. 4월 19일 강연 40여 일 전인 3월 8일에 김대중은 동아일보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서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동아일보>를 지킵시다'라는 제목의 후원 광고를 냈었다.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동아가 광고 탄압을 받건 말건 국민이 수수방관만 해주면 그들의 목적은 100퍼센트 달성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아는 그들의 소원대로 쓰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러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방관과 비겁은 자유에 대한 최대의 적입니다.
▲ "방관은 최대의 수치... 행동하는 국민이 살 수 있다" [1975년 김대중의 제안③]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이때 처음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김대중은 그 이후로 이를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1975년에 김대중은 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행동하는 양심'이 나올 당시의 시대적 배경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이후 국내의 민주화 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야당과 재야 그리고 학생운동까지 유신 정권의 강고한 억압에 억눌려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망명 투쟁 중이던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납치당해 5일 만인 8월 13일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지만 가택연금 등을 당해 활동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김대중은 건강 회복에 집중하면서 돌파구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는데 1974년 8월 23일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자 이를 민주화의 불씨를 살려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그는 김영삼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야당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해 11월 27일 발족한 민주회복국민회의에도 참여하면서 민주화 세력의 외연 확장에도 힘을 보탰다.
▲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었어야 했어" 1975년 10월 49제를 맞이하여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재야 인사들. 함석헌과 김대중 등의 모습이 보인다. 타살을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에 박정희 입장에서는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
ⓒ 장준하기념사업회 |
김대중이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이유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4월 19일 연설에서 김대중은 '행동하는 양심'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러분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함 선생님께서 자유당 때 '생각하는 국민이어야만 산다.' 말씀했는데 생각하는 국민, 행동하는 국민만이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무슨 폭동을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불법행위를 선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적으로 합법적으로 하세요. 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 무슨 법에 걸립니까? 자유가 있어야 이 나라의 건국의 국시가 산다는 말이 누구에게 걸립니까?
(중략) 떳떳이 나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우고, 떳떳이 나오기가 어려운 여건에 있는 사람들은 익명으로라도 엽서로, 전화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을 격려해서 그분들이 좌절 안 되도록 해줘야 합니다. 친구들하고 대포 먹는 돈, 다방에서 먹는 돈, 단돈 1,000원이라도 아껴가지고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구호를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나설 때 우리의 목적은 달성됩니다.
김대중이 이 시기에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것은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국민들의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김대중은 정치인, 지식인, 활동가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중심 세력 구축과 외연 확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층 엘리트 세력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각성과 실천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김대중은 생각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이날 연설에서 "나는 국민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행동하는 주권자가 되어서 자기 운명을 자기 힘으로 개척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쟁취한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고 강조한 김대중
▲ "국민 여러분, 행동하는 주권자가 되어주십시오" [1975년 김대중의 제안①]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 "이대로 가면 나라 결단나기 때문에 반대하고 싸운다" [1975년 김대중의 제안②]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김대중이 민주화 운동에 있어 양대 원칙으로 강조한 것이 평화와 자주였다. 평화는 비폭력, 비용공, 비반미 등의 3비(非)노선을 통해 국내에서는 중산층을 포함한 다수파 연합을 구축하고 해외에서는 한국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를 이뤄내어 민주화 이행에 성공해야 한다는 구상과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주는 민주화 이행을 타력이 아닌 우리 국민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김대중은 국민적 각성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고 국민적 실천을 통해 민주화의 길을 열어가는 승리의 역사를 개척할 때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김대중은 일본의 민주화와 비교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우수성을 강조했었다. 김대중은 일본의 민주주의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의해서 주어진 민주화의 결과였기 때문에 자생력이 약하다고 보았다. 그에 비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한 한국 국민들이 자력으로 쟁취한 것이기 때문에 역동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기반이 매우 강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은 그의 자주적 민주화론과 연결된 어록으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또한 한국 민주화의 과정과 한국 민주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김대중의 연설 자료 전체는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채널(클릭)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GF8qtQcd038yf_o9cl-bD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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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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