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마스는 비판하지 않느냐'고 묻는 당신에게

김경훈 2023. 11. 1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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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응하는 방법

[김경훈 기자]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공습 피해를 입은 가자지구 누세이라트 난민촌에서 생존자들을 찾고 있다.
ⓒ AP/연합뉴스
 
약 일주일 전, <내가 아침마다 이-팔 전쟁 뉴스를 검색하는 이유 https://omn.kr/264zv>라는 기사를 썼다. 나는 이 글에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는 피해의식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피해자인 나'에 '과몰입'하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가해를 정당화하는 서사 구조는 여러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인류 공통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중동 분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도 했다.

내 글에 동의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댓글도 많았다. 주로 '하마스의 민간인 테러는 왜 비판하지 않느냐'는 댓글이었다. 특히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탄압을 빌미로 이스라엘 민간인을 살해하고 납치한 것도 '내가 피해를 당했으니 가해자가 돼도 괜찮다'는 논리에 해당하는 사례 아니냐고, 본인도 객관성을 잃은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댓글은 날카로웠다.

사실, 나도 그 쟁점을 말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고발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기사의 댓글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반박 논리 중 하나인데, 워낙 중요한 문제다 보니 짧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내가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은 내가 그런 거리낌을 느끼는 이유, 즉 '왜 지난 글에서 하마스를 비판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다.

이스라엘의 폭력과 하마스의 폭력은 다르다

먼저 반박부터 하자면, 나는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명분 삼아 저지른 잔혹 행위와 하마스가 저지른 민간인 테러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폭력에 위계를 두고 싶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상황에서 벌어진 폭력을 추상적인 '가해'와 '피해'로 환원하는 것은 폭력의 맥락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나는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내세워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는 정당성을 따질 여지 자체가 없다고 본다. 대상이 완전히 잘못됐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유대인 학살은 늘 유럽 사람들의 스포츠였다. 그 스포츠를 결코 행하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제 대가를 치르고 있다"(<갈레아노, 거울 너머의 역사> 201쪽)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저지른 학살, 범위를 넓혀도 유럽의 반유대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진 일의 대가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치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에 반해 하마스의 행동은 적어도 팔레스타인이 이제껏 당해온 탄압과 폭력에 맞선 대항 폭력이다. 대항 폭력은 모두 정당하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 '독일에서 뺨 맞고 팔레스타인에 화풀이한' 이스라엘과는 똑같이 볼 수 없다는 말이다('뺨 맞고' '화풀이했다'고 하기에는 둘 다 너무나 큰 폭력이지만 비유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또 중요한 것은 홀로코스트는 완료된 폭력이지만,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수십 년간 이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폭력이라는 점이다. 물론 홀로코스트로 인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존재하지만, 나치의 유대인 학살 자체는 1945년에 종식됐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전기와 물이 언제 끊길지 모르고, 검문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을 넘어 이미 이번 사태 이전부터 계속 사람들이 죽고 있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에 따르면 9월 말까지 이스라엘군과 유대 정착민에게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주민은 230명에 이른다(2022년 한 해 동안의 희생자는 204명이었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조심스러워야 한다.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점은 이 문제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이자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인 우리의 책임은 없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폭력은 짧게 잡아도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중동 분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대인 정착촌이 지어진 것은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다. 가자지구는 이번 사태 이전에도 2008년부터 전쟁 내지는 전쟁에 준하는 상황을 다섯 차례 겪었다. 그동안 국제 사회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다행히(?) 한국의 책임을 물을 때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0월 27일, 한국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인도적 재앙을 막자는 유엔 총회 결의안에 기권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을 강제 철거하는 데 HD현대건설기계가 만든 굴착기가 사용된다. 지난 10년 사이 한국의 이스라엘 무기 수출액은 3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 시민인 우리는 지금의 사태에 아무 책임도 없을까?

나는 이번 사태를 말할 때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듯, 마치 심판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마스를 비판하기에 앞서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질 때까지 국제 사회가, 한국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믿는다.
  
 플랫폼C,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등 90개 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은 11월 4일 집회를 열어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중단을 촉구했다.
ⓒ 김경훈
 
세 번째는 '지금 하마스를 비판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이스라엘이 지상전에 돌입한 이후 사망자가 늘어나서 11월 6일 기준으로 가자지구에서 1만 22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신원 미상의 시신이 되지 않으려고 몸에 매일 이름을 적는다.

이게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가족, 친구와 연인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는 적들을 증오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건물 무너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을 배경음악 삼아서 '지금껏 우리의 투쟁 방식이 적절했는지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라면서 회의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은 아닌가?

정말 하마스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이유들로 나는 하마스를 비판하는 일에 조심스럽고, 누구든 하마스를 비판하기에 앞서 이 문제들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런 고민을 충분히 거친 비판도 지금 상황에서 유효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본다.

그래도 여전히 '하마스의 민간인 테러는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이 정말 하마스에 반대한다면 함께 이스라엘의 폭력을 비판하자'고 말하려 한다. '둘 다 잘못했으니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는 사실은 하마스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겠다.

이번 사태를 다룬 어느 기사에서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이 잘못됐다면 하마스의 민간인 테러도 잘못됐다고 해야 논리적인 거 아니냐'는 댓글을 봤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논리도 말해보겠다. 내가 이번 사태에서 확인한 논리는 '억압이 강할수록 저항도 격렬해진다'는 것이다.

10월 7일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 측 사망자는 1400여 명이다. 이번 사태 전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가장 큰 교전이었던 2014년 '프로텍티브 에지 작전'의 70여 명과 비교해도 매우 큰 숫자다. 사실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방공 시스템 '아이언 돔'을 뚫었던 것부터가 이스라엘의 억압적인 대팔레스타인 정책이 강력한 저항을 낳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고리를 끊는 '논리적'인 방법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한 폭력을 멈추는 것이다. 당장 언제 전기와 물이 끊길지 심지어는 폭탄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유대인 정착촌과 군인이라는 '적'이 위협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하자는 목소리는 힘을 얻기 어렵다. 이스라엘의 폭력이 끝나지 않는 한, 옳든 그르든 하마스와 같은 폭력적인 저항은 반복될 것이다. 이번 사태 전체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니 당신이 정말 하마스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둘 다 잘못했으니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는 기계적 양비론으로 사실은 하마스를 편드는 대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이제껏 지속된 팔레스타인 탄압을 끝내기 위해 행동하기 바란다. 그게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에 윤리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자, 심판이나 논평가가 아닌 한 명의 시민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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