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살짜리 주민번호 조작해 성인 교도소 보낸 나라
[김성호 기자]
좋은 영화를 보았다. 이제껏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민망해질 만큼 의미 깊은 영화였다. 지금껏 40년 가까이 살아온 한국 사회에 이런 면이 있었는지를 돌이키게 하고, 폭력과 비겁, 부조리함과 대면하여 아연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 안엔 소위 가졌다는 이의 무지, 배웠다는 이의 비겁, 가난한 자들의 용기며 작은이들의 지혜가 녹아 있었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이야기다.
▲ <미싱타는 여자들> 포스터 |
ⓒ 부천노동영화제 |
법이 법답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법이 법답지 않았던, 반세기 전 이 나라 수도에서 벌어진 참상을 꺼내어 살핀다. 누군가에겐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고, 그리하여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흔들이 관객 눈앞에서 헤집어진다. 이로부터 관객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나라가 대체 무엇에 빚을 지고 선 것인지를 되새기게 된다.
단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꿔낼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라면 바로 이런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단 하나의 공간, 그 작은 방이 수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내었음을 영화가 말한다. 그 공간은 평화시장 어느 건물 옥탑에 자리한 작은 교실이다. 어엿한 학교의 정규 교실은 아니라지만, 이곳을 찾는 이에겐 그 못지않은 의미 깊은 공간이다. 이름하야 새마을노동교실, 불행히도 이 교실로부터 비롯된 변화는 그리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귀결되지는 못한다.
영화는 과거 청계피복노동조합 조합원으로 활동한 평화시장 미싱사들을 카메라 앞에 세운다. 그들이 고작 십대중반, 많게는 이십대 초반이었던 1977년 어느 날로 영화는 옮겨간다. 이들은 이 해 9월 9일을 99사건이라 부른다. 99사건은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의 폐쇄를 막겠다며 농성을 벌인 노동자들이 체포돼 구속된 일이다.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옥상에는 노동자의 교실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미싱사들과 노동조합의 문제를 다루는데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1960년대부터 수도 서울의 피복산업을 떠받친 건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아이들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이 취업을 하겠다며 공장을 찾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렇게 채용된 이들은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종일토록 격무에 시달렸다. 남아선호와 고질적 가난이 맞물려 빚어낸 상황으로, 교육 대신 노동현장에 내몰린 어린 여자아이들이 허다했던 시절이었다. 이들에게 교육은 한없이 부럽고 닿을 수 없는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새마을노동교실은 많은 것을 바꿔주었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무시한 노동자착취에 분개한 전태일이 분신자살에 이른 뒤, 열악한 노동현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에 영부인이던 육영수 여사가 현장을 방문하는 등 관심이 이어졌고, 육 여사를 만난 어린 노동자의 제안으로 청계천 일대 한 건물 옥탑에 노동교실이란 공부방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청계천 일대 아동 노동자를 위하여 1973년 동화시장 옥상에 50평짜리 건물을 설치한 게 출발이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에게 기본적인 공부는 물론 통장 입출금 등 실생활 속 지식, 노동자로서의 권리 등을 교육했으며, 때로는 그 이상을 담당했던 게 이곳 노동교실이었다.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공권력에 맞서 싸운 여공들의 투쟁
영화는 청계천 일대 피복공장의 번성과 그곳에서 공공연히 자행된 노동착취, 특히 아동노동착취의 역사를 살핀다. 이어 전태일 분신 뒤 일어난 노조결성과, 이에 대해 보내진 탐탁지 않은 시선 또한 잡아낸다. 노조란 저기 은행이나 무역회사 같은 대단한 직장에만 있는 것이라 여겨지던 시절, 그 시대 평범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노조를 만들고 가입해 활동했는지를 노동자의 눈높이에서 보여준다.
노조는 임금을 떼먹지 말 것이며, 저녁 여덟시에는 정시퇴근을 시켜줄 것 같은 노동자의 권리를 강력히 지켜낸다. 청계천 일대 피복공장을 순찰하며 여덟시가 넘어서까지 가동하는 공장은 불을 꺼버리는 등 암약하는 노조원들을 향해 사업주들은 깡패가 아니냐는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격렬한 대립은 노조원들이 활동하는 터전이기도 했던 노동학교의 존폐논란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교실을 폐쇄하는 결정에 이르고 만다.
9월 10일 폐쇄가 결정되고, 이를 하루 앞둔 9일 건물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교실을 문 닫게 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어느덧 건물을 가득 메울 정도가 된다.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물을 받고, 올라오는 통로마다 바리케이트를 설치하며, 가지고 있는 종이에 아무렇게나 글씨를 써 저들의 요구를 알린다. 이내 경찰이 건물을 둘러싸고 본격적인 농성이 시작된다.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황당무계한 북한 개입설... 이유는?
당초 농성계획도 없이 삼삼오오 모여든 현장이다. 현장에 있던 노조 간부는 지도부라고는 할 수 없던 한 명 뿐, 일반 여공들이 대부분을 이뤘으니 인원파악부터 후속대책수립까지가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하다. 경찰에 의해 분산된 노동자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로 법적 대응은커녕 속옷 등 물건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긴 시간을 갇혀 지낸다.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제대로 보내주지 않아 차라리 교도소가 편했다는 증언이 속출할 정도다.
심지어는 재판과정 또한 볼 만 하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공소이유 앞에 최후의 변론을 하게 된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하나하나 나서 재판장에게 했다는 발언은 얼마나 명쾌한지 영화를 보는 이도 당시 재판정의 분위기를 짐작하기 충분하다. 사건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오늘날, 당시의 법원과 검찰, 경찰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으나,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산 이들은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저의 무고함을 드러내게 되지 않았는가.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민망할 정도로 저열한 시대가 있었음을
9월 9일은 노동교실 폐쇄예정일의 전날일 뿐, 이날이 북한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길 없던 노동자들이 제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경찰과 검찰, 법원까지 한통속으로 나오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한 노동자는 최후 변론에서 제 억울함을 소리쳐 주장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의 재판관 얼굴을 보고난 뒤 무력해졌던 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말 잘하는 어느 여공은 판사 앞에서 9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더 의심스러운 게 아니냐고 합당한 이야기를 해보기도 했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법원은 결국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했고, 경검은 조사과정에서 가장 어린 노동자가 소년원 대신 성인교도소에 가도록 주민등록번호까지 조작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민망할 정도로 저열한 민낯, 1970년대 한국이었다.
이혁래, 김정영 감독이 연출한 <미싱타는 여자들>은 과거의 상처를 덮어둔 채 지내던 한때의 노동자들을 불러모아 이 같은 과거를 오늘의 햇살 아래 펼쳐낸다. 그들을 탄압한 이들이 마침내 스러지고, 태양 앞에 떳떳한 건 여기 모인 노동자들이란 걸 만천하에 알린다. 그로부터 관객은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났던 우리 역사의 과오를 알게 된다. 우리가 딛고 선 오늘이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피땀에 빚지고 있는지를 일깨우는 것이다. 알아야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 닿아야 하지만 닿지 않고 있는 것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다큐멘터리의 본령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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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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