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이야기꾼
Q : 서울에 언제 왔는지
A : 이틀 전에 도착했다. 지난 5월 처음 서울에 왔는데,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Q : 서울의 첫인상은
A : 오기 전에는 막연하게 도쿄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이곳만의 고유한 특징이 보이더라. 거리에 보이는 패션 스타일이 아주 세련됐고, 일본에 비해 조금 더 섬세하고 디테일하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조금 더 오픈 마인드랄까. 우호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Q : 한국 브랜드와는 첫 협업인데, 이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A : 가장 흥미를 느낀 부분은 코오롱스포츠의 기술력이다. 과거 푸마에서 5년 동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으면서 쌓았던 스포츠웨어에 대한 이해, 기능성에 포커스를 맞춘 접근을 보다 완성도 있게 펼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50년간 지속해 온 브랜드라는 점에서 믿음을 느꼈다.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기술력과 매력적인 히스토리가 바탕에 깔려 있으니 ‘나만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느껴지더라.
Q : 방금 전시 준비를 마쳤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어떤가
A : 영상 작업이 멋있게 나왔다. 사전에 아이디어와 컨셉트를 설명하긴 했지만, 오늘 결과물을 보니 내가 상상했던 스토리와 무드가 잘 표현돼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여기 온 관람객들이 이 영상과 설치물을 통해 컬렉션에 담긴 이야기를 흥미롭게 즐겼으면 좋겠다.
Q : 이번 작업을 하면서 한국 전통의상인 한복에서도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A : 이 컬렉션에 과거와 미래를 녹여내고 싶었다. 한국인들이 과거에 입었던 한복을 살펴봤는데, 그중에서도 옷을 여미는 방식(옷고름)이 흥미로웠다. 가슴께에 달린 기다란 끈으로 몸에 맞게 옷을 조이고, 매듭짓는 방식을 보니 예전 작업에서 구명조끼를 재해석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점에 착안해서 미래의 옷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복과 구명조끼, 항공에서 온 디테일을 옷고름 매듭과 믹스했다. 특히 한복의 옷고름이 좋았던 점은 다른 전통의상에서 볼 수 있는, 옷과 따로 떨어져 있는 벨트가 아니라 끈 자체가 옷의 일부라는 점이었다. 매듭을 여미면 끈과 옷이 하나의 셰이프로 통합된다는 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Q : 하나의 룩 안에 과거와 미래가 혼재돼 있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컬렉션 노트에 쓴 ‘유동적인 시간(Liquid Time)’이란 표현이 관련 있을 것 같다
A : 나는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이 순서대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 시작 지점부터 중간 지점, 마지막 지점을 넘나들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타임리스(시간을 초월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을 유동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내 모든 컬렉션에 녹아 있는 핵심 아이디어다.
Q : ‘조선시대 한반도 앞바다에 떨어진 우주인’이라는 설정도 재미있다. 단순히 캐릭터만 구상한 게 아니라고
A : 미래에서 과거로 타임슬립한 우주인이 한반도 앞바다에 불시착한 뒤 육지로 이동하는 여정을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었다.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도착한 우주인이 그 지역의 새로운 문화를 습득하며 적응해 나가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서 물과 땅을 표현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번 컬렉션의 테마이자 전시 제목이기도 한 ‘Across the Water’도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종착지는 각자가 해석하고, 정하는 것 아닐까?
Q : 이야기에 등장하는 우주인은 어떤 의미인가
A : 우주인은 우리의 호기심을 뜻한다. 호기심은 중요한 미덕이다. 낯선 상황에 직면해도 스스로를 우주인이라고 여길 만큼 호기심이 있다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다채로운, 컬러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Q : 참신한 스토리텔링을 컬렉션에 녹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아이디어를 얻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
A : 많은 사람이 책이나 영화, 이야기에서 영감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진짜 관심 있는 분야, 영향을 받는 분야는 인류학이다. 항상 남과 동떨어진 거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하면 그 사실에 기반해 조금 더 리서치하는 식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편이다. 물론 더 알고 싶고, 궁금한 것이 있을 땐 책도 찾아 읽지만,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는 결국 내가 바라보는 사람과 인류, 우리 문화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과거의 역사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언어가 우리 성격이나 행동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같은 것이다. 지극히 내 관점에서 흥미를 느끼는 것들이다.
Q : 그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시각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풀어낼 때 자신만의 비결이 있나
A : 물론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을 말 그대로 옮겨 담거나 1차원으로 표현하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한다. 오히려 디자인 작업을 할 때는 느낌에 의존한다. 이런 작업을 30년 동안 해왔더니 이제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어떤 개념이나 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축적되는 것 같다.
Q : 코오롱스포츠는 한국을 대표하는 테크니컬 웨어 브랜드인데, 이번 협업에서도 기능적인 면을 고려했는지
A : 사계절의 기온차가 극단적인 한국의 자연환경에서 실용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민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레이어드다. 다만 단순히 겹쳐 입는 개념에 그치지 않고 레이어드를 통해 옷을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컬렉션 속 아이코닉 리본 다운 재킷은 베스트와 점퍼를 겹친 형태인데, 쇼트 점퍼로도 입을 수 있지만 바깥쪽 점퍼를 오픈해 뒤로 펼치면 옷의 형태가 바뀌어 롱 베스트로 입을 수도 있다.
Q : 그렇다면 입는 사람이 날씨나 스타일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해서 연출할 수 있겠다
A : 그래서 옷의 구성 요소 하나하나를 최대한 탈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앞서 한복에서 착안한 리본 디테일도 떼었다 붙일 수 있고, 글러브를 탈착할 수 있는 푸퍼도 있다. 혹은 곳곳에 지퍼를 달아 원하는 만큼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디테일은 한국의 기온차를 고려한 것이지만, 옷을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하고 재창조하면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컬렉션을 만들고 싶었다.
Q :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애정하는 제품은
A : 앞에서 말한 형태를 변형할 수 있는 아이코닉 리본 다운 재킷, 그리고 푸퍼 포메이션 쇼트 다운 재킷과 푸퍼 포메이션 베스트의 조합을 꼽고 싶다. 조합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두 피스가 완전히 하나의 피스처럼 결합할 수 있어서다. 재킷에 달린 지퍼와 테이프를 베스트와 연결하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옷이 처음부터 하나로 만든 것처럼 합쳐진다. 단순히 겹쳐 입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피스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내 의도를 잘 표현해 주는 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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