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결혼 압박... 각종 곡물까지 지원해
[김종성 기자]
KBS 사극 <혼례대첩>에서는 국가가 노처녀·노총각의 결혼 문제에 개입했던 왕조시대의 풍경이 그려진다. 유명한 노처녀 삼자매인 20대 초중반의 맹하나·맹두리·맹삼순을 결혼시키기 위해 임금이 어사까지 파견하고 여기에 중매쟁이가 가세하는 장면을 이 드라마에서 볼 수 있다.
▲ KBS 드라마 <혼례대첩>의 한 장면. |
ⓒ KBS |
노총각, 노처녀의 의미
이런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볼 때는, 스무 살만 넘어도 늙을 노(老)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었던 왕조시대 사람들의 삶이 숨막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동용 유교 교재인 <소학>을 해설한 <소학집주>에 따르면 옛날에는 여성 20세, 남성 30세에 결혼하는 게 이상적이었다. 이 나이를 넘기면 '노'자가 붙기 쉬웠다.
이 관념의 영향력은 꽤 오래 이어졌다. 불과 얼마 전인 20세기 후반에도 한국에서는 스물 다섯 정도 된 여성이 노처녀로 불리고 서른을 넘긴 남성이 노총각으로 불리는 일들이 많았다.
왕조시대에는 그런 노처녀·노총각이 많아지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고 인식됐다. 이는 왕조시대의 정치논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왕실은 자신들이 천지만물에 대한 관리권을 하늘로부터 위임받았다고 자처했다. 그 권한 속에는 음양의 조화도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음양의 이치로 해석할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조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왕실은 그런 음양의 조화 역시 자신들의 권한이자 책임이라는 인식을 선전하면서 정치적 지배권을 합리화했다. 이런 상태에서 노처녀·노총각의 발생을 음양의 부조화에 따른 결과로 설명했기 때문에, 노처녀·노총각 문제에 대해서도 왕실과 국가가 당연히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가 조선시대 법전에도 반영됐다. <경국대전>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책무와 관련해 "국정 전반을 통할하고 음양을 다스리며 국가를 경영한다"고 기술했다. 삼정승도 임금을 도와 음양을 조화시킬 책무가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런 책무를 구체화시키는 조항들도 규정됐다. <경국대전>은 "결혼 적령기를 넘길 경우에는 한성부 및 도(道)가 도움을 제공하고, 사안이 심각할 경우에는 호조·감영·읍에서 별도의 지원을 제공한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원은 쌀이나 콩 같은 곡물의 지급이었다. 드라마 <혼례대첩>에서는 왕실 부마이자 어사인 주인공 심정우(로운 역)가 맹씨 삼자매에게 접근해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조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결혼 지원이 이뤄졌다.
공식적으로는, 음양의 부조화 때문에 노처녀·노총각이 많아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왕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폐나 다름 없는 곡물을 지원했다고 볼 수 있다.
<소학>에서는 20세, 30세를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지만, 이 나이를 넘긴 사람들을 무조건 노처녀·노총각으로 규정하고 복지 혜택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몇 살 이상을 지원할 것이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조정했다. 여성의 경우에는 20세 이상 혹은 25세 이상을 지원했고, 남성의 경우에는 대체로 30세 이상을 지원했다.
물질적 지원을 받는 것은 반가운 일일 수 있지만, 스무 살이나 서른 살만 넘겨도 '노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시절 사람들에게도 서글픈 일이었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인지상정이다.
이성계가 48세 때인 1383년의 일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음력으로 계해년인 이해 9월에 그는 평복 차림으로 지금의 원산시 남쪽인 안변을 통과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서 두 농민이 김을 매고 있었고, 그 주변에 뽕나무가 서 있었다.
뽕나무에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이성계는 활을 들어 두 마리를 동시에 떨어트렸다.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본 두 농민은 "훌륭합니다! 도령의 활솜씨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기분이 좋아진 이성계는 웃음을 띠면서 "나는 도령은 지났소"라고 말했다. 활솜씨가 좋다는 말을 들은 것보다 도령이라고 불린 것에 기분 좋게 반응했던 것이다.
48세 된 이성계를 도령으로 불러준 두 농민는 이를 계기로 이성계의 측근이 되고 9년 뒤에 세워질 조선의 개국공신이 됐다. 두 농민의 이름은 한충과 김인찬이다.
왕실에서 더욱 거셌던 혼례 압박
어리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이처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된다. 그런데도, 20세와 30세를 넘기면 '노'자가 붙을 수도 있었으니, 이는 왕조시대 대중의 스트레스 중 하나였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스트레스에 훨씬 많이 노출된 것은 왕실 자제들이었다. 이들의 결혼 적령기는 일반 대중보다 훨씬 빨랐다. 이들은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했다. 그래서 10대 중반만 돼도 노처녀·노총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세종의 손녀이자 문종의 딸인 경혜공주의 혼인에서도 나타난다.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세종은 경혜공주가 14세가 된 1449년부터 급격히 위독해졌다. 52세인 세종의 건강 상태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왕실이 서두른 것 중 하나가 경혜공주의 혼인이다.
세종이 사망할 경우, 경혜공주는 삼년상 동안에는 혼인할 수 없었다. 삼년상은 윤달을 제외한 25개월이므로, 이 기간이 지나면 경혜공주는 10대 후반이었다. 왕실 기준으로 하면 노처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이 급히 얻은 배우자가 전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경혜공주가 전 서울시장의 아들과 혼인한 날은 음력으로 세종 32년 1월 24일(양력 1450년 2월 6일)이다.
세종이 눈을 감은 것은 그해 음력 2월 17일(양력 3월 30일)이다. 임금이 오늘 내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왕실이 혼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왕실에서 노처녀가 생기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이 혼사의 진행을 추동했던 것이다.
노처녀·노총각의 발생은 음양의 부조화 때문이라고 인식됐으므로, 왕실에서 노처녀가 발생하는 것은 왕실 내에서 음양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표시가 될 수 있었다. 음양의 운행을 담당해야 할 왕실에서 이런 변고가 생기는 것은 왕실이 세상을 다스릴 자격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왕족 자제들의 혼사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이 후궁 윤소의(폐소의 윤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옹주가 있다. 1623년에 발생한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광해군이 실각되고 윤소의가 처형당했을 당시, 이 옹주는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아니었다.
폐옹주가 된 그의 결혼이 추진된 것은 20년 뒤인 1643년이다. 광해군이 유배 중에 사망하고 2년이 지난 뒤에 혼인이 추진됐던 것이다. 인조 21년 4월 18일자(1643년 6월 4일자) <인조실록>에는 옹주의 4촌인 인조가 혼수비용의 지급을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옹주의 어머니인 유소의는 남편이 실각되고 이틀 뒤 처형을 당했다. 그 뒤 옹주는 외삼촌의 보호하에서 성장했다. 이로 인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옹주는 10대 초반은 물론이고 스물을 넘긴 뒤에도 결혼하지 못했다. 왕실을 기준으로 해도 노처녀이고 일반 대중을 기준으로 해도 노처녀였으니, 이 때문에도 위축될 수 있었다. 그런 옹주를 위해 옹주의 원수인 인조가 결혼을 지원했던 것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옛날에는 결혼 압력이 가족뿐 아니라 사회로부터도 강력하게 가해졌다. 결혼적령기로 인식되는 나이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가 '노'자를 들이대며 압박을 가했다. 문종의 공주나 광해군의 옹주는 이런 압력을 일반 대중보다 훨씬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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