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릴라 얼굴을 한 여성들의 출현... 뉴욕이어야만 했던 이유 [진혜윤 교수의 미술, 도시 그리고 여성]
[진혜윤(한남대 회화과 교수)]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미술가 단체다. 1985년 뉴욕에서 결성된 이래 지금까지 특유의 게릴라성 이벤트를 통해 미술계에 보이지 않는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 등 각종 인권 문제에 맞서 싸워왔다.
내후년이면 이들이 활동한 지 벌써 40주년이 된다. 이젠 이들을 따르는 팬들도 상당수다. 이들보다 10년 앞서 유사한 활동을 벌였던 '예술 노동자 연합(Art Workers Coalition, 1969-71)'과 '게릴라 아트 액션 그룹(Guerrilla Arts Action Group, 1969-76)'과 같은 단체들은 5~6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모두 해체했다. 이에 비해 게릴라 걸스는 거의 시작과 동시에 유명세를 얻었고 아직까지 건재하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게릴라 걸스를 이토록 특별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그동안 미술계는 이들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왔을까?
▲ 게릴라 걸스- 나쁜 행동의 예술 2018년 1월 24일 독일 하노버의 케스트너 게젤샤프트에서 열린 '나쁜 행동의 예술' 전시회 시작에 앞서 두 게릴라 걸즈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연합뉴스/dpa |
게릴라 걸스는 유머, 캐리커처, 정확한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한 슬로건, 익명성, 대중 친화적 매체를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여성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벗어야만 하는가?>(1989)다. 직설적인 질문의 제목과 더불어 "현대미술 섹션에서 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5% 이하지만, 누드 작품의 85%는 여성이다"는 강렬한 텍스트가 시선을 끄는 이 작품은 미국 최대 규모의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남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를 근거로 폭로한다.
▲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1814) |
ⓒ 앵그르 |
고릴라 가면은 게릴라 걸스의 시그니처 이미지다. 가면은 익명으로 활동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고릴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건 아니다. 활동 방법을 고심하던 중 한 멤버가 '게릴라(guerrilla)'라고 악필로 남긴 메모를 다른 멤버가 '고릴라(gorilla)'로 잘못 읽은 해프닝에서 비롯됐다.
<여성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벗어야만 하는가?>는 본래 뉴욕시 맨해튼 남단의 소호(Soho), 이스트빌리지(East Village), 트라이베카(Tribeca) 등지에 붙여질 벽보로 제작되었다. 이곳은 게릴라 걸스의 주요 활동 무대이자 1970년대부터 거리 예술, 행위 예술, 페미니스트 미술, 사회운동이 번성하던 지역이었다. 또 1980년대 들어서는 이들의 문화를 쫓아 들어온 갤러리스트들과 월가의 자본가들에 의해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게릴라 걸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당시 가장 트렌디한 예술 문화를 이끌던 미술가 집단과 비미술가 집단이 함께 보고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들에게 예술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담론이고 논제다.
그런데 관할처인 뉴욕시공공예술기금(New York Public Art Fund)이 벽보에 대해 불허가 처분을 내리면서 게릴라 걸스의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대신 이들은 뉴욕시 공공버스 광고란을 활용하는 방안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오래, 더 깊이 각인될 수 있었다.
▲ 게릴라 걸스의 포스터가 지난 2012년 10월 9일 미국 시애틀의 시애틀 미술관에서 여성 전용 전시의 일환으로 선보이고 있다. 포스터의 제목은 '여성 예술가의 장점'이다. |
ⓒ AP/연합뉴스 |
태초에 게릴라 걸스가 있었다
게릴라 걸스는 본명 대신 역사적으로 이름난 여성 위인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한다. 그룹의 창립 멤버는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나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 같은 여성 작가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의 유산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 시작은 이들이 1984년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전시 <최신 국제 회화 조각전>에 반발하는 거리 시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전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홍보한 이 전시는 총 165명의 참여작가 중 여성 작가는 10%도 되지 않았고, 비백인 중에서는 단 한 명의 여성 작가도 포함되지 않았다. 단순히 여성 작가들이 남성 작가들에 비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까.
▲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무제(멍하고 혼란스러운 프로젝트) 1996/2015"가 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FIAC 아트 박람회에서 전시되고 있다. |
ⓒ AP/연합뉴스 |
지금까지도 게릴라 걸스는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나 제니 홀저(Jenny Holzer)처럼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주 무기로 미술계에서 여성 예술가의 인지도를 높이고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들이 공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1985년 뉴욕의 주요 미술관 네 곳에 중에서 여성 미술가의 개인전이 이뤄진 곳은 단 한 곳이고, 수많은 갤러리 중에서는 단지 네 개의 상업 갤러리만이 흑인 여성 예술가의 전시를 올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수치는 여전히 큰 폭의 변화를 만들진 못하고 있다.
▲ 2019년 3월 21일 미국의 예술가 제니 홀저의 전시회 개막을 기념하여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정면에 그의 작품이 투사돼있다. |
ⓒ EPA/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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