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에서 수난 당한 여성... 단 한명이 필요했다
[김성호 기자]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불특정 피험자와 미리 섭외된 연기자를 데리고 하는 실험으로, 쉬운 퀴즈를 낸 뒤 답을 듣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3번이 답인 오지선다 문제를 낸 뒤 연기자 일곱 명 뒤에 피험자가 답을 말하도록 한다. 순서대로 답을 말하는 탓에 피험자는 앞선 일곱 명이 동일한 오답을 말하는 것을 듣는다. 저 말고 모든 사람이 특정한 오답을 이야기하면 피험자 상당수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다. 피험자 넷 중 셋이 앞선 이들이 이야기한 오답을 말한다.
흥미로운 건 여기서 조건을 달리하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피험자에 앞서 답한 일곱 명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정답을 말하도록 한다면 정답률은 금세 100%에 가깝게 회복된다. 피험자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에 앞서 정답을 말하는 단 한 명의 동료, 다른 목소리의 존재다.
이 실험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첫째, 인간은 옳지 않다고 믿는 일을 스스로 행할 수 있다. 오로지 다른 이들이 모두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그릇된 일에의 자발적 동참이 이뤄지는 것이다. 여기엔 어떠한 강요도 필요치 않다. 모두가 부당함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둘째, 인간은 단 한 명의 동료만 있다면 그릇된 일에 기꺼이 저항할 수 있다. 아닌 건 아니라고,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 선화의 근황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20대 여성 선화가 빵집에서 겪은 일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가 초청한 단편 <선화의 근황>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바로 이에 대한 영화라 할 수가 있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2018년도 졸업작인 21분짜리 단편으로, 빵집에 갓 취업한 사회초년생들의 모습으로부터 인간의 비겁과 부조리의 승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은 선화(김소형 분)다. 어렵게 취업한 빵집에서 선화는 홀서빙을 맡고 있다. 처음엔 빵을 만드는 부문으로 지원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 우선 홀 업무가 주어진다. 직원을 총괄하는 박 과장(임호준 분)은 금세 생산직에 자리가 날 거라며 선화를 다독인다.
영화는 이내 빵집의 일상으로 이어진다. 바삐 돌아가는 매일 가운데 선화는 생산직으로 일하는 진경(문혜인 분)을 발견한다. 진경은 선화와 중학교 동창으로, 가깝지는 않지만 얼굴은 알고 지내던 사이다. 난 데 없는 만남에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둘은 서로의 일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 선화의 근황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일상화된 폭력과 따돌림... 이대로 괜찮은가
그렇다고 진경의 삶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박 과장을 비롯해 주변 여러 사람이 진경을 은근히 무시하고 따돌리는 모습이 거듭 등장한다. 심지어는 무거운 밀가루 포대를 옮기고 철판을 닦는 일 따위를 진경이 전담하고 있기까지 하다. 온갖 고되고 더러운 잡무에 지친 나머지 진경이 일을 나누어 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지만 변화는 전혀 없는 모양이다. 도리어 진경이 조직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개인주의자 쯤으로 평가되어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빵집의 문화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대개의 주방 문화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남초 조직이 가진 부조리함이 영화의 전면에 드러난다. 생산직 직원 가운데 여성은 막내인 진경뿐으로, 다른 직원들은 여성들을 향해 적나라한 농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험한 일을 막내에게 몰아주고는 다른 이들에게 돕지 말라고 이야기까지 해둔 모양이다.
부문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빵집에서 일하며 마주칠 밖에 없는 일이다. 선화는 차츰 진경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직접 본 것도 있거니와 박 부장이 다가와 진경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 것이다. 진경 또한 유일한 친구이며 또래 여성인 선화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선화는 다른 누구보다 사정을 정확히 알게 된다.
▲ 선화의 근황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단 한 명의 동료를 지켜야 하는 이유
물론 남초조직이라 해서 부조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인과 동거 후 임신까지 했다는 진경이 잦은 지각을 하는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아마도 다른 구성원들과 잘 어우러지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일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진경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막내가 철판을 닦는 등 고된 일을 하는 것 역시 다른 남자 직원들은 묵묵히 거쳐온 과정일 수도 있을 테다. 2년 가까이 반죽을 하고도 여전히 업무를 잘 하지 못한다는 설명대로 실력이며 열정이 기준에 미달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박 부장과 몇몇 이들이 진경을 대하듯 그녀가 남자직원, 소위 군대를 다녀와 싹싹하고 일머리 있는 이들에 비해 불평불만만 많고 일을 잘 못하는 막내인 것처럼 비춰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선명한 부조리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자가 들기에 벅찬 밀가루 포대를 옮길 때 도구를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거나, 여성에게는 듣기 거북한 농담을 공공연히 하는 것 따위가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조직원도, 심지어 진경이 처한 상황이 불쌍하다고 여기는 이들조차 나서서 문제를 말하지 않는 상황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결국 영화의 끝에서 선화는 한 명의 동료도 찾지 못한 피험자처럼 75%의 평범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 부천노동영화제 포스터 |
ⓒ 부천노동영화제 |
한국은 공익제보자를 지키는 사회인가
공익을 위하여 제가 속힌 조직의 문제를 폭로하는 이를 서구에선 '휘슬 블로어(whistle blower)'라 부른다. 휘슬을 불어 공중에 문제를 알린다는 측면을 높이 평가한 이름이다. 서구 법제는 이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기능하며, 휘슬 블로어에 대한 보상체계 또한 충실히 마련돼 있다.
반면 한국은 이들을 내부고발자로, 또 배신자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히 강하다. 공익제보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제보자가 공익제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속한 집단과 법정싸움을 벌이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조직원이 공익제보자를 공공연하게 따돌려 트라우마를 겪는 사례는 얼마나 많은가. 이로부터 모나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는 격언이 법칙처럼 유통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름을 말하는 한 명이 나오기 힘든 사회는 <선화의 근황>이 보여주듯 수많은 선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어쩌면 선의 동지가 될 수 있는 이가 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진경과 선화를 보호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들어간다는 사실이 영화 <선화의 근황>이 말하려는 바라고 하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동관 탄핵과 맞바꾼 방송3법, 대통령이 거부하면 생길 일
- 대통령 안보관이 만든 절망... 그렇다고 '문재인'은 맞을까
- 노지 야영의 끝판왕, 모든 게 허용되는 땅
- '평점 100점' 최고의 맥주 베스트블레테렌을 손에 넣었으나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정부에 빵 서기관, 커피 사무관... 실제로 있습니다
- "학부모들이 너무 좋아해", 인천 동산고 옥상의 비밀
- 이재명 재판부 "검찰, 법에서 정한대로 하라"
- 미-중 15일 샌프란서 정상회담... 미 "북한의 도발 우려 강조할 것"
- [단독] 군 검찰, 외압 주요인물 진술 증거목록에서 뺐다
- 윤 대통령 "농업인, 스마트팜·수직농법에 관심 가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