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선 죽어야 의사 볼 수 있다?…연봉 세계 1위에도, 구인난 왜
" “하혈 등 이상 증세에 부인과 전문의를 보려고 해도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랍니다. 오죽하면 암 걸린 사람은 죽은 후에야 의사를 볼 수 있다고 할까요.” "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진모씨는 중앙일보에 수년 전부터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게 힘들어졌다며 이렇게 전했다. 텍사스주(州) 오스틴에서 거주 중인 그는 "돌 아기 검진도 수개월 전에 예약했는데, 일정이 꼬여 놓치면 다시 수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며 "의사 진료가 어려워 심하게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안 가고 버티는 사람이 많다"고 밝혔다.
이처럼 미국에서 의사 진료를 받는 게 쉽지 않은 이유는 일단 의사 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고령화로 의료 수요는 빠르게 늘어나는데, 의료 현장의 의사 수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아칸소주와 같은 시골 지역이 이런 현상이 심하다.
미국의학대학협회(AAMC)에 따르면 향후 10년 이내 미국에서 의사가 최대 12만4000명 더 필요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21~2022년 미국의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는 2.7명으로, 노르웨이(5.2명), 독일(4.5명), 호주(4.0명), 프랑스(3.4명) 등보다 적다. OECD 주요국 평균인 3.7명보다도 뒤처졌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는 한국(2.6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특히 미국 의사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받고, 의대 지원자도 넘쳐나는데 의사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 의사의 평균 연 소득은 35만 달러(약 4억5000만원)로 전 세계 의사 중 가장 높다. 상위 10%의 평균 소득은 130만 달러(약 17억원)에 이른다. 미 의사 중 연 소득 하위권인 가정의학과 의사의 소득(연 23만 달러, 약 3억원)도 미국 전체 소득자 중 상위권에 속한다.
의대를 지망하는 지원자들도 많은 편이다. AAMC에 따르면 미국 의대 약 190곳에서 총 2만 3000여명의 의대생을 선발했는데, 지원자는 최근 5년 동안 매년 5~6만명이 지원했다. 평균 경쟁률은 2대 1 정도다.
그럼에도 미국에 의사가 부족한 상황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원인 중 하나로 코로나19 팬데믹 때 늘어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퇴직한 의사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세대가 대거 은퇴할 시점이 됐으나, 의대 정원 제한 등으로 신규 인력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도 원인으로 꼽았다.
보건·과학 정보 전문기업 엘스비어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의료 인력의 약 20%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일을 그만뒀다. 현재 의대에서 학업중인 의대생 25%도 2~3년 안에 학업을 그만두고 싶다고 답했다. 보고서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자신의 정신 건강과 '워라밸'에 대한 염려, 의사 부족 사태가 미칠 영향 등으로 의사를 그만두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전직을 고민하던 이들 대부분은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임상의 대신 학술·연구·제약 분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사협회(AMA) 제시 에렌펠 회장은 "대부분의 의사는 이제 더는 자식들에게 의료계로 가라고 권장하지 않는다"며 "의사들이 이 직업에 대한 기쁨을 잃었다"고 전했다.
강현석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대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중앙일보에 "예전엔 대학병원 의사나 개업의 등 선택지가 적었는데, 최근엔 미 식품의약청(FDA) 같은 정부기관, 제약회사 등을 비롯해 IT 회사같이 전혀 다른 분야로도 진출한다"면서 "환자를 보면서 고생하고 위험을 감수하느니, 편한 진로를 택하는 젊은 의사들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베이비부머 세대 의사들이 은퇴를 앞두면서 구인난은 더 심해지고 있다. AAMC에 따르면 현재 의사 5명 중 2명이 넘는 꼴로 65세 이상에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예상한다. 베이비부머 대부분은 퇴직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예 40대 중·후반부터 은퇴를 희망하는 의사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미 의사재단(PF)이 전했다.
미 의대들의 입학 정원 제한 정책도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이코노미스트·WP 등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 미 보건복지부는 1990년대가 되면 의사 잉여 인력이 7만여명이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AAMC 등 의사 단체들도 장기간 정원 확대에 반대하면서 의대 정원과 해외 의대 졸업생들의 미 의사 자격 취득 등이 제한됐다. 아울러 전공의에 대한 지원도 축소되면서 의대 졸업생들이 실력을 쌓을 수 있는 병원이 줄어들었다.
강현석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선 고령화 등으로 의사 인력 부족이 심화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면서, 지난 20여년 동안 30여개의 의대가 신설되는 등 의대 학생 수가 35% 정도 증가했다"면서 "다만, 미국은 수련 받지 않으면 의사면허를 받을 수가 없는데, 전공의 증원은 느리게 이뤄지고 있어 비판이 나온다"고 전했다.
미국의 의사 부족 상황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는 "미국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의대 학생을 증원했어도 여전히 구인난"이라면서 "한국도 의사 부족으로 의대 증원이 논의 중인데, 의료 현장에 나오기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일단 인력 유출을 막고 필수의료 분야에 배치하는 등 여러 대책이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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