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
가끔씩 대장동 ‘50억 클럽’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박영수 전 특별검사를 떠올릴 때가 있다. 특히 차를 타고 그의 자택이 있던 서울 반포동 아파트 근처를 지날 때는 자주 생각한다. 박 전 특검은 법정에 정장을 입고 출석하지만, 한때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까지 올랐던 그가 푸른색 수의를 입은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개인적 친분이나 인연은 없다. 다만 그가 국정농단 수사를 지휘하던 2017년 출근길 자택 앞에서 선배들과 돌아가며 ‘뻗치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마디라도 듣고자 낡은 저층 아파트 현관 앞에서 새벽부터 서성였던 선배는 특검의 아침에도 밥 짓는 냄새가 났다고 했었다. 밥내음이 나던 그 자리는 요즘 대규모 재건축 공사가 한창이다.
얼마 전에는 반포에서 현충원을 지나던 출근길에 도로가 막혀 당황한 적이 있다. 이 시간에 막힐 길이 아닌데 생각하던 차에 현충원 입구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 44주년’이라 쓰인 플래카드를 봤다. 차에 갇혀 있던 지난달 26일 아침 윤석열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현충원 안에서 악수를 나눴다. 6년 전 윤 대통령은 박 전 특검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 수사팀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시 세 사람은 훗날 이런 상황에 서로가 놓이게 될 줄 알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도로 경호 해제를 기다렸다.
사실 윤 대통령이 당선된 시점부터 이런 식의 공상을 자주 하고 있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2017년 정도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6년 전 사람들에게 문재인정부 초대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으로 직행한 뒤 야당 후보로 대선에 나와 정권 교체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주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성범죄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고, 국정농단 사건의 수사 검사와 탄핵 대통령이 서로 웃으며 악수를 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아마 지금 사람들에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차기 대선 후보로 나와 당선된 뒤 최강욱 전 의원을 신임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와 유사한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실없는 공상을 멈출 수 없는 건 최근 수년간의 한국 정치 상황이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로 흐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을 상상하는 것이 정국을 예견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한국 정치는 황당한 전개를 반복하고 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아무리 미워도 대선에서 혁혁한 역할을 했고 1등급의 공신”이라고 표현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신당 창당을 앞두고 비명(비이재명)계와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통과를 주장해 서먹한 사이가 됐던 박지현 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이 대표 단식 현장을 찾아 눈물을 쏟은 뒤 내년 총선 서울 송파을 출마를 선언했다. 21대 총선 민주당 비례 위성정당으로 국회에 입성한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여당 품에 안겼다. 아무리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고 선거철엔 철새가 난다고 해도 그냥 받아들이긴 쉽지 않은 상황들이다. 이래도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을 상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할 수 있을까.
이젠 습관적으로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을 떠올리게 됐다. 가장 현실성이 낮은 상황을 상상하다 보면 시끄러운 세상살이에서 조그만 해법을 찾은 것처럼 복잡하던 마음이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면 화낼 일도 절망할 일도 없다. 가수 양희은의 에세이집 ‘그러라 그래’ 같은 마음이다. 1973년 건전가요로 뽑혀 상을 받았던 ‘아침이슬’은 느닷없이 빨간 줄이 그어지는 금지곡이 됐다. 1987년 해금된 이후 이 노래가 어떻게 됐는지도 역시 말할 필요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예측불허 상황이 전개되는 한국 정치가 역동성의 상징인지, 단순 스트레스 덩어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머리 아픈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주말에는 지금 가장 벌어지지 않을 일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어떨까. 황당한 상상이 설사 현실로 나타나더라도 ‘내가 맞혔다’는 순간의 기쁨은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양민철 산업1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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