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의 발견] 동백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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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동백마을에 다녀왔다.
마을 주민들이 마련한 특별한 식사 자리라고 했고, 동백꽃이 그려진 근사한 초대장도 받은 터였다.
동백마을 저녁 식사는 정원집 잔디밭에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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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동백마을에 다녀왔다. 마을 주민들이 마련한 특별한 식사 자리라고 했고, 동백꽃이 그려진 근사한 초대장도 받은 터였다. 이제야 가을로 접어든 제주의 한적한 한라산 남쪽 산록도로를 달리며 오랜만의 동백마을 방문에 조금 설렜다. 행정구역으로는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이나 모두에게 동백마을로 불리는 그곳.
동백마을과는 오래전 특별한 인연이 있다. 매거진 창간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흥미로운 할망 콘텐츠를 찾아 제주 곳곳을 수소문하고 다니던 중 동백마을 갑생할망을 뵙게 됐다. 아흔둘 할망이 처음 보여주신 것은 소녀 때부터 평생 써 오신 일기였다. 오래돼 빛바랜 표지들의 일기장은 그대로 할망의 인생 연대기였다. 일기 내용은 거의 딱 한 줄씩.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이웃집 아무개와 국수를 말아먹고, 볕이 와랑와랑 쏟아지기에 오랜만에 이불 빨래를 해 널었다는 등의 그리 특별할 일 없을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사소하고 담담한 보통 사람들의 삶이 시간을 만나 차곡차곡 포개져 만들어진 것들의 위대함을. 더군다나 누구보다 치열하고 처절했던 근현대사를 몸으로 겪은 제주의 어르신은 한 분 한 분이 한 권의 책일 수밖에 없다. 구순의 할망은 건강하고 활기차셨다. 그 비결을 동백기름 때문이라고도 하셨다. 매일 아침 일어나 생동백기름 한 숟가락을 드셨단다. 얼굴에도 바르고, 아픈 곳에도 바르고. 척박했던 시절 이 마을에선 동백기름이 약 대신이었다고 했다.
동백마을 저녁 식사는 정원집 잔디밭에 차려졌다.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장식된 벽에서 갑생할망의 서툴고 다정한 글씨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동박지름 아맹고랑몰아 머거바사 알주’(동백기름은 그냥 말로 해선 몰라, 먹어봐야 해요). 글자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글로 전하신 올해 101세 할망의 안부에 마음이 울컥했다. 마을 이장님의 인사와 함께 떠들썩한 식사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과 반가운 안부를 나누며 최근 동백마을이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가 발표한 ‘2023년 최고의 관광 마을’에 제주 세화마을과 함께 선정된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조금 어둑해진 동백숲을 산책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인 1706년, 인근 토산에 살던 광산 김씨 아무개가 이곳에 처음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던 설촌의 역사가 정확히 기록된 마을. 집을 짓고 울타리 삼아 심은 동백나무가 300년이 흘러 깊고 깊은 동백숲을 이뤘고, 동백씨앗이 떨어질 무렵이면 마을 어르신들만 씨앗을 주울 수 있게 한 오래된 약속하에 할망들이 찬찬히 주운 씨앗을 마을 방앗간에서 비싸게 사고 정성껏 동백기름을 짜서 파는 동백마을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진짜 제주를 만나고 싶은 여행자에게 동백마을에 가보길 권한다. 이삼일 머무르며 동백숲을 산책하고 마을 방앗간에서 동백기름을 짜고 같이 밥을 해먹다 보면 이 섬과 깊숙한 우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곧 갑생할망을 뵈러 가야겠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할망의 일기를 책으로 엮어 내는 일을 실천할 때가 온 것 같다.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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