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나님의 일터] 제 경영철학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자’… 설교서 힌트 얻었죠

신은정 2023. 11. 1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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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 바이네르 김원길 대표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가 서울 구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회사를 운영하며 느낀 소회를 밝히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지난달 16일 서울 구로동 구로노인종합복지관 강당에서 ‘어르신 건강콘서트’가 열렸다. 200여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무대 쪽을 응시했다. 오후 2시 행사가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기다린 어르신도 있었다. 초대 가수 노래가 끝나고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의 남성이 단상에 올랐다. 할머니 관객에게 “누님”이라고 부르며 넉살 좋게 웃는 이는 컴포트화로 잘 알려진 수제 구두 회사 바이네르의 김원길(60) 대표다. 행사 전 기자와 만난 김 대표는 “제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준 세상에 나누고 봉사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10월 셋째 주에만 효도잔치 3번이나 치른다니 그 다짐이 빈말은 아니었다.

배곯던 시절 동네잔치의 따스한 추억

김 대표가 효도잔치를 시작한 건 20여 년 전부터다. 식사를 대접하거나 이야기 나누고 바이네르 기념품을 드리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40대부터 지금껏 꾸준히 어르신을 모시는 이유는 어린 시절 받았던 따스한 추억 때문이다. 김 대표는 “어릴 적 배고프게 살았는데 동네 어르신 회갑잔치 때는 조건 없이 배부르게 얻어먹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기억하는 첫 효도잔치는 바이네르 본사가 있는 경기도 일산의 한 식당에서였다. 회사 사정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르신 150명 정도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직접 노래도 불러드렸다. 그는 지금도 어르신 잔치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때에 따라 노래하고 강연도 한다. 회사 대표라고 무게 잡으며 후원만 하는 게 아니었다. 김 대표는 “가난한 제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도와준 것은 고객이고 세상인데 이렇게라도 직접 갚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설교서 힌트 얻은 경영 이념 3가지

김 대표는 10여년 전부터 3가지 경영이념을 가슴에 품고 바이네르를 이끌고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자’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자’ ‘그 속에서 나도 행복하게 살자’다. 출석하는 교회 설교에서 착안했다고 했다. 그는 현재 일산의 한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처럼 김 대표는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이 깊다. 바이네르가 다양한 사회공헌 사업에 적지 않은 돈을 흘려보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효도잔치 외에 군 장병에게 미국과 유럽 호주 등 해외 연수를 코로나19 이전까지 꾸준히 지원해 왔다. 지진 피해를 본 튀르키예 이재민에 1억원 신발 기부, 장애인단체에 아이스링크 1년 대여비 지원, 강원도 춘천에서 농촌목회를 하며 7남매 다둥이를 출산한 목사 가정에 1억원을 쾌척한 것도 모두 올해 이뤄진 선행이다. 바이네르는 아이 셋 다둥이 엄마에게 무료로 신발을 제작해 주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바이네르는 직원이 셋째를 낳으면 2000만원 장학금도 준다. 천안함 사건 당시 김 대표는 바이네르 직원과 함께 2100만원 성금을 모아 쾌척하기도 했다.

포기 순간 찾아온 기적 “하나님이 주신 기회”

인터뷰 직후 복지관 강당에서 열린 효도잔치에서 어르신들에게 건강 박수를 알려주는 장면. 신석현 포토그래퍼

컴포트화를 제작하는 바이네르는 원래 이탈리아 기업이었다. 구두 장인, 제화업계 영업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린 김 대표는 1994년 구두 회사를 차렸다. 이후 바이네르의 국내 판권·상표권을 따내 영업을 해왔다. 그런데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바이네르를 2011년 인수하는 기적이 김 대표에게 일어났다. 국내 판권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순간에 찾아온 행운이었다고 김 대표는 회상했다.

바이네르 창업자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이 유럽과 홍콩에서 사업을 확장하려던 시점에 국내의 많은 바이어가 바이네르 판권을 달라며 본사와 접촉한 것이다. 경영난을 겪던 본사는 김 대표에게 ‘로열티를 올릴 수 있다’며 압박했다. 그러던 중 유럽발 금융위기가 터졌고, 하루에 100곳 넘는 이탈리아 회사가 문 닫는 상황이 펼쳐졌다. 은행 신용도가 좋았던 김 대표는 대출할 수 있다는 은행 지점장 말에 힘입어 본사에 승부수를 던졌고 인수의 물꼬가 터졌다. 김 대표는 “하나님이 저에게 기회를 주신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대기업보다 인정받는다는 ‘기쁨’

기업을 운영하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묻자 김 대표는 부끄러운 듯 말을 이어갔다.

“우리 회사는 규모가 크지 않아요. 그런데 나보다 10배, 100배 더 큰 회사의 대표와 어울려도 주변에서 우리를 더 좋게 평가할 때가 있어요. 우리가 적지 않게 봉사하고 주변에 나누는 것 때문일 거 같아요. 매출 몇천억 혹은 몇조짜리 기업에 비하면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회사지요. 하지만 밖에서 대우는 같거나 더 나은 것 같아요.(웃음)”

김 대표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다. 중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다. 중학교 졸업 후 충남 당진 시골 마을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 17세 어린 나이에 구둣방에서 일하면서도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며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대표는 ‘인생의 예습과 복습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며 교회를 다니길 권면했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돌아보고, 또 교회 문을 나오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기도한다”며 “하루 이틀은 별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10년을 놓고 보면 인생을 예습 복습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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