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파란만장 인생 조각들… 하나님의 종 되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맹경환 2023. 11.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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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말씀으로 통일 세대 준비
파주 오산교회 이동혁 목사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파주 오산교회 이동혁 목사. 그는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큰 그림이 있음을 믿는다”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루하루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하나님은 분명 앞으로의 삶에도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현 포토그래퍼


교회가 좋아 늘 교회에서 살던 아이, 교회 6층 옥상에서 떨어졌어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중학생, 한때 가수를 꿈꾸며 ‘날라리’로 기억되던 음대 신입생, 한국컨티넨탈싱어즈 소속 찬양 사역자, 라디오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전도사.

10년 전 이른 나이에 경기도 파주 오산교회 담임목사로 위임받기 전 이동혁(45) 목사의 인생 조각들이다. 이 목사는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큰 그림을 갖고 한 조각 한 조각 맞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 목사가 “하루하루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믿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제 삶에서 분명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최근 만난 그의 신앙의 삶 속에서 늘 그의 인생에 개입했던 ‘하나님의 큰 그림’을 들을 수 있었다.

월요일이 싫었던 아이

이 목사는 ‘학교 공부보다 신앙생활이 더 중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목사 집안의 신앙은 할머니부터 시작됐다. 충남 논산에 사시던 할머니는 6·25 때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함께 상경했다. 그때 처음 정착한 곳이 충무로였다. 당시 충현교회가 바로 집 옆이어서 자연스럽게 고(故) 김창인 목사의 전도로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을 갖게 됐다.

성경을 읽고 적으며 한글을 깨우친 할머니는 늘 성경을 곁에 두셨다. 성경 말씀 한 장을 읽으면 1000원씩 용돈을 주시던 할머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항상 이 목사의 손을 잡고 주일예배는 물론 말씀 사경회마다 찾아다녔다.

충현교회가 역삼동으로 이전할 때 이 목사 집도 교회를 따라 강남으로 이사했다. 이 목사가 열 살 무렵이었다. 이 목사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면서 “교회 친구들과 만나 놀고 공부하는 게 너무 행복해 주일이 지나 월요일이 오는 게 싫었다”고 말했다.

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난 뒤 겪은 사고

교회가 마냥 좋고 복음의 메시지는 항상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인격적 거듭남은 체험하지 못하던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중학생이 되기 직전이던 1991년 1월 경기도 광주 충현기도원 겨울 수련회 때였다. 말씀 집회를 마친 뒤 기도 시간에 이 목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멀뚱멀뚱 무릎만 꿇고 있었다. 그때 당시 중등부 교사였던 홍경호 선생님(현재 새에덴교회 부목사)이 다가와 뒤에서 안아주면서 이 목사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이 목사는 “그때 선생님의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었고, 제가 죄인인 것과 저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고, 주님이 제 마음속에 찾아와 함께하시고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날 이 목사는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밤새 찬송을 불렀다.
중학교 1학년 이동혁 목사(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서울 충현교회 친구들과 연극 ‘사도 바울’ 공연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그해 5월 이 목사는 교회에서 뜻밖의 사고를 당한다. 여름 수련회 때 연극 ‘사도 바울’을 올리기 위해 준비하다 충현교회 교육관 6층에서 추락한 것이다. 이 목사는 “충현교회 교육관 옥상이 풀밭이어서 연극 연습도 하고 놀기도 했는데 환풍기 뒤 6층 옥상에서 지하 2층 화장실까지 연결된 구멍에 빠져 떨어졌다”면서 “코와 입 사이가 크게 찢어져서 수술을 받았지만 다른 곳은 골절 없이 찰과상 정도만 있었다”고 했다.

두 달 만에 퇴원한 이 목사는 여름 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목사는 “나중에 아버지와 함께 사고 현장을 찾았는데 철근 같은 것도 튀어나와 있었다”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슈퍼맨으로 불리던 중학생

이 목사는 가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그 사고가 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고가 나중에 난 것도 어쩌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처음엔 ‘왜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실까’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었는데 원망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저를 쓰시길 원한다는 강력한 음성이 들렸다”고 말했다.

사고 후 이 목사는 교회에서 ‘슈퍼맨’이라 불렸다. 소심한 성격이었던 그는 성도들 앞에서 간증하면서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 되기로 결단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방학 때면 매주 금요 심야 예배를 마친 뒤 교회 버스에 올라 충현기도원으로 가서 밤새워 기도하고 토요일 새벽차를 타고 돌아왔다. 이 목사는 “당시 하나님이 찬양의 은사도 주셔서 항상 찬양팀 리더로 찬양 인도 사역을 했다”면서 “그때부터 음악 목사에 대한 꿈을 갖게 돼 총신대 교회음악과(작곡 전공)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세상의 가수가 되려던 대학생

대학 1학년 때 친구들은 아마 이 목사를 ‘날라리’로 기억할지 모른다. 이 목사는 고등학교 친구의 소개로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7개월 동안 남성 보컬 그룹 멤버로 데뷔를 준비했다. 보컬과 작곡을 맡은 이 목사는 술은 하지 않았지만 멤버들과 술자리에도 자주 함께했다. 하지만 갑자기 회사가 망하고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다. 이 목사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실패를 경험한 순간”이라고 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 ‘다시 가수에 도전해 볼까’ 하는 갈등과 고민도 있었다. 그때 학교 선배의 권유로 찬양선교 사역을 하는 한국컨티넨탈싱어즈 오디션에 도전해 통과했다. 그해 겨울 순회공연에 나서 찬양하면서 이 목사는 ‘나는 세상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그냥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했다고 한다.

이 목사가 총신대 신대원 시절 개강 수련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


“그때는 회사가 왜 망했는지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이 막으셨던 것 같아요. 세상의 가수로 노래하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하셨던 거죠. 가수 데뷔 준비할 때 세상과 친해지면서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졌어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저를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길로 인도하셨어요.”

북한과 가장 가까운 파주에서 목회

대중음악이 아닌 찬양으로 돌아온 이 목사는 음악 목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좋은 찬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학적 바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신학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총신대 신대원 목회학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전도사 시절 피아노를 전공한 강한나 사모를 만나 결혼한 이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미국 유학을 떠나려고 했다. 이 목사는 합창 지휘로, 강 사모는 피아노로 한창 유학을 준비하던 2011년 어머니가 혈액암 판정을 받으면서 유학을 포기했다. 하나님은 이때 이 목사의 진로를 목회로 바꾸셨다.

전도사 때 북한 새터민 청소년 캠프 찬양 인도를 하면서 북한 청소년에게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이 목사는 극동방송 ‘남과 북이 하나 되어’의 방송 작가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 알면 알수록 통일되지 않은 남한 땅에서 북한 청소년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저 막연한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그에게 2013년 오산교회 담임으로 위임받는 기회가 왔다. 음악 목사가 되는 것보다 담임목사가 되는 걸 더 바라셨던 어머니는 아들이 담임목사가 되는 걸 보고 돌아가셨다. “하나님께서 왜 아무 연고도 없는 파주 땅에 보내셨을까”라고 기도하던 이 목사에게 하나님은 북한과 가장 가까운 파주에서 찬양과 말씀으로 통일 세대를 준비시키는 비전을 주셨다.

이 목사는 2016년부터 ‘테루아’라는 이름으로 파주 지역 8개 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연합해 청년들이 모여 예배하는 모임을 인도하고 있다. 음악의 끈도 놓지 않았다. 최근에는 14명의 목사 부부를 모아 합창단을 조직했다. 앞으로 성가대가 없는 작은 교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할 계획이다.

“나중에 은퇴 후에 많은 찬양을 작곡하고 싶어요. 저에게 음악과 목회가 분리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과 목회 사역은 저에게는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천사 민하

지난해 총신대 신대원 설교학 석사 과정 졸업 후 큰딸 민하(왼쪽)와 둘째 딸 세하, 강한나 사모와 함께했다.

2008년 결혼한 이 목사 가정에 이듬해 사랑하는 첫째 딸 민하가 태어났다. 황달이 심해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민하는 네 살 무렵 말이 어눌해 검사를 받으니 지적장애 3급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이 목사는 “처음 검사 결과를 받아들고 ‘하나님께서 왜 우리 아이에게 장애를 주셨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도 아프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제는 민하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있다. 이 목사는 “민하를 통해 많은 성도가 위로받고 또 장애아를 둔 성도들을 만나게 하고 저희 가정을 통해 위로받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항상 어둠 속에 있을 때 힘이 되어주시고 빛을 비춰 주셔서, 왜 내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결국은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두렵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이 빛을 비춰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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