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최애 지하철 코스엔 힐링 주는 ‘풍경 반, 사랑 반’

최기영 2023. 11.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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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거사’와 함께 지하철 여행을 떠나다

지공거사(地空居士). ‘지하철을 공짜로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65세 이상 고령자들에게 수년째 통용돼오던 은어다. 이 은어가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끈 건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외신들이 무료 승차 혜택으로 ‘지하철 나들이’를 즐기는 한국 노인들의 일상을 소개하면서부터다. 기사 제목은 ‘지하철 여행에서 기쁨을 찾는 대한민국의 노인들’이었지만 그렇게 조명된 지공거사의 일상은 ‘도시철도 무임수송 손실’ ‘고령 인구 활동성 증가를 통한 국가적 의료비용 절감’ ‘고령사회 연착을 위한 대책 마련’ 등이 맞물리며 논의의 확장을 불러왔다. 고령 세대의 ‘지하철 활용법’이 이동 수단을 넘어 하나의 사회문화적 활동으로 자리매김하는 사이 한국교회는 어느 역쯤에 정차하고 있을까. 국민일보는 한 지공거사의 지하철 여행에 동행하면서 교회의 현 위치와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가능성을 엿봤다.

지하철로 새 삶 얻은 ‘거사’와 걷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거사를 다 만나러 와주시고. 부끄럽네요.” 지난 2일,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역사에서 만난 강문현(가명·82)씨가 쑥스러운 듯 인사를 건넸다. 익숙하게 시니어 패스(무임교통카드)를 꺼내 승강장으로 향하던 그는 “9시 반쯤 되면 그래도 좀 한산해져 눈치가 덜 보인다”고 했다. 지공거사들 사이에 지켜진다는 암묵적 규칙이 떠올랐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대 피하기’ ‘자리 양보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가급적 젊은 세대 앞에 서 있지 않기’.

7년 전 남편과 사별한 강씨에게 지하철은 몇 안 되는 세상과의 접점이다. 핏줄이라곤 두 딸과 남동생뿐이지만 타국에서 생활하는 두 딸은 명절에도 영상 통화로만 만나는 사이가 됐고 남동생은 오랜 병환으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다. 그는 “단칸방에서 외부와 접촉을 끊다시피 한 채 2년여를 보내고서야 바깥 공기가 제대로 쉬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나를 다시 일으켜 준 게 지하철”이라고 회고했다.


33분 만에 도착한 도봉산역엔 가을 단풍 명소를 찾아 나선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산행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10분쯤 걸어 도착한 도봉탐방지원센터 인근 쉼터가 강씨의 야외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산에 오르기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무릎을 가리키며 손사래 쳤다. 그러면서 “대신 도봉산 정상 자운봉을 보고 싶을 땐 가는 곳이 있다”며 나섰다.

도봉드림센터 모습.


새소리가 들리는 개울 산책로를 10분여 걸어 도착한 곳은 도봉감리교회(이광호 목사)가 운영하는 한 카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오르자 도봉산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탑 카페가 등장했다.

도봉드림센터 4층 루프탑 카페에서 바라본 도봉산 전경.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별다방’이니 하는 큰 카페는 부담스러워. 젊은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가격도 만만찮지. 근데 이런 카페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해. 평생 교회라고는 발 들여본 적 없는데 여기도 교회가 운영한다고 해서 놀랐어. 겉보기엔 예쁜 동네 카페인데 사람들도 따뜻하고 좋아.”

산책길서 만나는 쉼터, 교회

다시 도봉산역으로 향하던 강씨는 “진짜 여정은 지금부터”라고 했다. 한결 더 한산해진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에코백에서 체코의 문학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집을 꺼내 폈다. 다음 목적지인 인천역까지의 소요 시간은 2시간에서 딱 2분이 모자랐다. 지하철은 그에게 백색 소음으로 채워진 이동식 도서관이 돼줬다.


인천역 1번 출구 건너편 차이나타운 입구부터 동인천역 도원역 신포역까지 중구 지역에 펼쳐진 인천 둘레길 12코스엔 인천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산책로가 가득하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걷다 보면 완만한 오르막 끝자락에 송월교회(박삼열 목사)가 운영하는 ‘카페 라브리’가 쉼터처럼 기다린다.

인천 내동교회 전경.


인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유공원 산책로를 거닐다 내려오면 유럽 여행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석조식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1891년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인천 내동교회다. 강씨는 “이곳을 지날 때면 24년 전 남편과 오스트리아를 여행했던 추억이 떠오른다”며 “그땐 길을 걷다 성당에 들러 묵상도 하고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듣곤 했는데 여긴 문이 닫혀 있어 아쉽다”고 했다.

인천 내리교회 웨슬리예배당 내부.


내리막길이 마무리되는 지점엔 한국의 어머니 교회로 불리는 인천 내리교회(김흥규 목사)와 1901년 당시 모습을 복원해 십자가형 건축물로 지어진 웨슬리예배당이 기다린다. 교회에선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인천 제물포 지역과 교회 역사를 아우르는 역사탐방코스(약 1시간 소요)를 연중 무료로 진행한다.

탐방 사역 실무를 맡은 최영호 행정 목사는 “수도권은 물론 제주에서까지 연간 6000여명의 탐방객이 찾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는 프로그램”이라며 “요즘엔 평일 주말 구분 없이 성도뿐 아니라 지자체 그룹 탐방팀, 학교 체험 탐방팀 등 비기독교인들도 많이 찾는다”고 설명했다.

교회, 거사들 곁에 다가서다

지하철 이동 동선이 긴 거사들에게는 각 노선의 시작과 끝에 다다르는 역, 그중에서도 역 인근에 쉬어갈 만한 공간이나 산책로가 조성된 곳들이 인기가 높다. NYT 보도로 부각된 인천공항역, 미사역(5호선), 올림픽공원역(5호선, 9호선) 등도 그중 하나다.


미사역은 미사호수공원, 망월천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로 지공거사뿐 아니라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하천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혜림교회(김영우 목사)가 운영하는 카페 ‘뜰’을 만날 수 있다. 산책로를 걷다 공짜 커피의 ‘은총’을 얻을 수도 있다. 이 교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카페 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커피 쿠폰을 구입해 주변에서 나눠주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공원역 인근의 오륜교회(김은호 목사)는 파크뷰가 내려다보이는 노을 맛집으로 꼽힌다. 교회가 운영하는 카페 ‘토비아스’(1·6층)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되돌아보는 것도 좋다.

김영우 혜림교회 목사는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고 사라질수록 복음은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라며 “한국교회의 다양한 공간이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이웃에게 부담 없이 멈췄다 갈 수 있는 역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래픽=신민식

인천·하남=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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