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표가 있던 땅에서

이마루 2023. 11. 1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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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1가 683번지를 44년간 지켰던 삼표레미콘이 성수동을 떠났다. 개발이 잠시 유예된 찰나를 파고 들어 바라본 풍경.
성수문화예술마당 개장식 날, 객석 부스에서 담은 풍경. 용비교 너머 옥수동이 보인다.
성수문화예술마당 개장식 날, 객석 부스에서 담은 풍경. 용비교 너머 옥수동이 보인다.
평화로운 중랑천. 옛 삼표레미콘 성수동 공장 부지는 중랑천과 서울숲과 맞닿아 있다.

지난 10월 5일 성수문화예술마당 개장식에 참석한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축하 말이 울려 퍼졌다. 3선 구청장과 시의원, 삼표 관계자, 200명 남짓한 구민들이 한데 모였던 하늘은 맑았다. 1977년부터 서울 한복판을 40년 넘게 차지하고 있던 땅. 공장 건물 철거가 완료된 지난해 8월 이후에도 한동안 펜스로 가려져 있던 땅의 한복판에 서자 한눈에 담아본 적 없었던 풍경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 한가로운 중랑천, 높이 81m의 응봉산, 경의중앙선 응봉역과 역사 뒤로 층층이 쌓인 행당동 아파트와 주택들, 굽이굽이 강변북로와 이어지는 용비교, 그 뒤편 옥수동 아파트 단지와 살짝 존재감을 드러낸 남산서울타워 그리고 응봉산의 두 배는 훌쩍 넘는 높이의 갤러리아포레와 아크로서울포레스트까지.

높이 81m의 응봉산과 팔각정.
중랑천 너머로 보이는 응봉역과 부지를 잇는 350m의 보행교도 생겨날 전망.

삼표레미콘 성수동 공장 철거는 오랜 시간 성동구민들의 숙원 사업이었다. 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우선 서울숲이다. 2005년 6월, 시민의 숲으로 개장한 서울숲공원은 성수대교북단 교차로를 한가운데 두고 생태숲과 광장, 정수장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교차로의 사면 중 한 면을 차지하는 곳이 삼표레미콘 성수동 공장이었던 것. 본디 서울시는 서울숲 조성계획 당시 61만㎡을 계획했으나 삼표 공장을 비롯한 특정 부지를 포함하지 못해 48만㎡ 규모로 축소 조성한 바 있다. 서울숲 접근 통로 중 하나인 ‘뚝섬서울숲’ 버스정류장이 정차하는 곳 또한 바로 공장 입구 앞 대로변이니, 완전한 서울숲의 이용에도 공장이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보다 더 강경하게 언급된 것은 환경과 안전 문제다. 하루에도 수십 대씩 드나드는 대형 덤프트럭과 레미콘 트럭,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시멘트 가루와 흙먼지, 굉음은 주민들, 그중에서도 근방 성수중 · 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오랜 골칫거리였다. 이에 성동구 주민들은 지난 2015년 ‘공장이전추진위원회’를 자발적으로 구성해 15만2000여 명이 참여한 공장 이전 요구 서명운동을 포함해 공청회와 범구민 결의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펼쳐왔다.

성동구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철거 직전의 삼표레미콘 성수동 공장의 풍경 사진.

갈등은 수십 년 전에도 있었다. 1980년 7월 8일 자 〈조선일보〉는 ‘성수1가 강원산업 삼표골재에서 온종일 요란한 소음이 계속되고 작업 과정에서 일어나는 먼지가 주변을 뒤덮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며, 1987년 2월 10일 자 〈매일경제〉는 이미 서울시로부터 이전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전 비용보다 저렴한 벌금을 물면서 가동하고 있는 시멘트 공장에 대한 비판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 물론 공장도 이유가 있다. 시멘트와 자갈 등을 물과 섞어 만든 레미콘은 90분이 지나면 굳어 버리는 특성상 건설 현장과 가까이 자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표산업은 이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유물 발굴 문제로 송파구에 자리한 풍납공장 건물 일부를 2014년에 철거한 바 있다. 성수동 공장 또한 2017년부터 부지 이전을 꾸준히 시도했으나 마땅히 대체할 부지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삼표 측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2023년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두 곳의 시멘트 공장이 자리한 곳이 강남구 세곡동(천마콘크리트공업)과 송파구 장지동(신일씨엠)이라는 것, 2016년 이미 서울을 떠난 한일시멘트 공장이 있던 곳 또한 서울 외곽인 구로구 개봉동이었음을 상기하면 도심 한복판을 차지한 삼표레미콘 성수동의 ‘존버력’은 아무래도 이례적인 면이 있는 셈이다.

응봉동 대림아파트 너머 층층이 쌓인 주택들의 풍경.

그러나 사실 성동구 주민도, 건설업 종사자도, 그렇다고 토지 소유자는 더더욱 아닌 내게 이 모든 사연은 부차적일 뿐. 강남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수년 간 매일 같이 응봉교를 지나 성수대교를 건너는 직장인에게 삼표레미콘 공장은 재미있는 출근길 풍경 중 하나에 가까웠다. 오래된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레트로한 ‘SAMPYO’ 로고와 하늘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룬 경쾌한 컬러는 특히 여름이면 한껏 무성해진 주변 풍경과 잘 어울렸다. 출근 시간대에 끝없이 공장 출입구로 진입하던 트럭들이 사라진 지금이라고 해서 출근길이 안 막히는 것도 아니고, 생뚱맞은 곳에 있는 버스정류장은 가끔 일부러 내려 맞은편 무성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환승 버스를 기다리기 좋았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 쌓은 투박한 담 너머로 주차장 무인요금 정산소와 화장실이 비죽이 솟아오른 지금 모습이 오히려 멋없게 느껴질 정도다.

개장식과 주말에 예정된 공연을 위해 준비된 객석과 임시무대.

성수동1가 683번지, ‘성수문화예술마당’이라는 임시칭호를 단 이 부지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 예전에는 이 또한 서울숲 공원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대대적인 개발이 확정된 상태다. 번지수에서 이름을 가져와 ‘S683 프로젝트’라는 명칭을 붙인 삼표그룹 홈페이지의 야심 찬 설명을 빌자면 ‘성수동 공장 부지는 TAMI(Technology, Advertising, Media, Information) 산업 중심의 글로벌 미래 업무중심 복합단지로 계획될 예정’이다.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 설계로 친숙한 데이비드 치퍼필드, 부르즈 칼리파를 설계한 SOM을 비롯해 위르겐 마이어, KPF 등 해외 유명 건축사무소들이 올해 8월 말 공모안을 제출했으며, 이 밑그림을 토대로 2025년에 본격적으로 착공에 돌입할 예정. 한강변 층수 제한 해제가 된 지금, 이곳에 들어설 건물은 5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개장식과 주말에 예정된 공연을 위해 준비된 객석과 임시무대.

이곳에 찾아온 변화가 계속 호기심을 잡아끄는 이유는 성수동이 지난 20년간 서울에서 가장 흥미롭게 변신한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2005년에 개장한 서울숲의 넓은 녹지는 현재 연평균 750만 명이 찾는다. 2012년에는 수인분당선이 개통하며 ‘서울숲역’이 탄생했고, 2011년 완공한 갤러리아포레, 2020년 공사를 마친 아크로서울포레스트는 현재 한남동 파르크와 한남더힐에 이어 서울에서 가장 높은 평당 가격을 자랑하는 고급 거주지다. 무엇보다 뚝섬부터 서울숲까지 아우르는 성수동 일대는 그 자체로 엄청난 자생력을 가졌음을 입증했다. 과거 경공업의 중심지였으나 1997년 IMF를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했던 이 지역이 2014년 서울시 도시재생시범사업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완벽하게 재탄생한 것을 우리는 모두 지켜봤으니까. 과거에 창고로 쓰였던 붉은 벽돌 건물과 수제화, 피혁, 인쇄 공장 건물들이 공유 오피스를 비롯해 새로 들어선 건물들과 한데 뒤섞인 성수동의 지금을 가까이서 목격한 이들이라면, 이 지역이 다른 서울의 ‘핫 플레이스’처럼 금세 뜨고 질 일이 없다는 걸 확신할 것이다. 서울시 공공개발기획단은 최근 응봉역과 삼표레미콘 공장 부지를 잇는 길이 350m, 폭 10m의 보행 및 자전거 겸용 도로를 만들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멀리 보이는 남산서울타워.

‘성수동문화예술마당’ 개장식날 찾았던 부지는 다음날 예정된 NCT 127의 정규 4집 쇼케이스, 그리고 역시나 같은 주말에 열릴 ‘원 유니버스 페스티벌’ 준비로 붐볐다. NCT 127은 2020년 아크로서울포레스트 D타워로 사옥을 이전한 SM엔터테인먼트(현재 서울숲역의 정식 명칭은 ‘서울숲(SM타운)’ 역이다)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룹이다. 박재범, 에스파, 릴 우지 버트 등이 무대에 섰던 ‘원 유니버스 페스티벌’의 주최 또한 성수동을 토대로 성장해 온 라이프스타일브랜드 피치스(Peaches)였으니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과 비슷한 규모인 1만5000명까지 수용 가능한 새로운 공연장으로서, 꽤 유기적이고 근사한 시작을 알린 셈이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갤러리아포레와 아크로서울포레스트.

마침 NCT 127의 쇼케이스가 열렸던 금요일은 퇴근이 늦었다. 창문을 닫은 택시 안에서도 공연 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꾸 창밖으로 시선을 흘끔흘끔 던지는 내게 택시 기사가 말을 걸었다. “저기 원래 공장 있던 데 아니예요?” “맞아요. 당분간 저렇게 공연장으로 쓴대요. 나중에 오피스텔이나 큰 건물 같은 게 들어오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겠지. 저 금싸라기 같은 땅을….”

금싸라기 같은 땅. 끝없는 철거와 개발이 이뤄지는 서울에서는 모처럼 생겨난 빈 땅이 공원이나 공연장으로 쓰이는 것보다 초고층 건물 부지로 쓰이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 건물이 들어선 이후의 성수동은 부동산으로서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잠시 비게 된 이 풍경을 눈 안에 담아두도록. 다시 펜스가 처지고 공사가 시작된 이후, 이 탁 트인 풍경은 아주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장면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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