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점 100점' 최고의 맥주 베스트블레테렌을 손에 넣었으나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 직영 레스토랑 '인 데 브레데' |
ⓒ 윤한샘 |
나는 직원이 안내하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빠르게 메뉴를 둘러봤다. 맥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베스트블레테렌 블론드, 8, 12, 모두 병맥주였기에 특별히 고를 것도 없었다. 음식도 고민 없이 플랑드르 스타일의 고기 요리를 주문했다.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기념품 매장에서 맥주를 사야 했다. 이미 오후 6시가 넘어 매장 문을 닫을 수 있기에 서둘러야 했다.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판매원의 얼굴에는 이미 짜증이 붙어있었다. 계속 몰려드는 사람들로 지쳐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 순간을 몇 년 동안 기다렸던 나에게 그녀의 상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베스트블레테렌 12 6병이 들어있는 박스가 눈에 띄었다. 베스트블레테렌 12라니,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오늘 이 맥주가 내 손 안에 없다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게 분명했다. 기념품 매장 문을 닫기 전, 간신히 줄을 서 맥주를 구매했다. 더 사고 싶어도 팔지 않는다. 이렇게 콧대가 높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게 바로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는 힘이었다.
▲ 성 식스투스 수도원 전경 |
ⓒ 윤한샘 |
베스트블레테렌 수도원으로 더 알려진 성 식스투스 수도원은 1831년에 설립됐다. 맥주는 수도원이 시작된 지 7년이 뒤인 1838년부터 만들어졌다. 일부 수도사들은 스쿠르몽 수도원으로 건너가 시메이 맥주가 탄생하는 데 일조했다.
베스트블레테렌은 다른 벨기에 트라피스트 수도원과 달리 독일 군에 점령당하지 않는 행운을 누렸다. 구리 케틀을 뺏기지 않은 수도원은 세계 대전 중에도 꾸준히 맥주를 생산했다. 여전히 수도사들이 맥주 양조에 직접 관여한다는 점도 특별하다.
허나 전 세계 맥주 마니아가 베스트블레테렌을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다른 트라피스트 맥주가 합법적인 유통 채널에서 비교적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반면 베스트블레테렌을 마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 수도원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 식스투스 수도원은 맥주 유통을 하지 않고 있다.
▲ 서빙을 기다리는 베스트블레테렌 트라피스트 맥주들 |
ⓒ 윤한샘 |
물론 이 맥주가 단순히 희귀성만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베스트블레테렌 12는 수년 전부터 주요 미국 맥주 평점 사이트에서 모두 100점을 맞으며 최고의 맥주로 칭송받고 있다. 2012년 베스트블레테렌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예가 미국에서 있었다. 수도원 지붕 공사 자금을 위해 한시적으로 베스트블레테렌 12 6병 세트를 미국에 판매했는데, 24시간이 되지 않아 준비된 1만 5천 세트가 모두 팔려버린 것이다. 가격은 무려 84.99달러(약 11만 원)였다.
어떻게 수입됐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도 잠깐 보였던 적이 있다. 330ml 한 병에 무려 5만 6000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일 만한 가격이었지만 나 같은 사람은 눈물을 머금고 구매했다. 아니, 벨기에 가는 비용보다는 훨씬 더 저렴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일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희귀한 것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두렵기까지 하다. 이후 가격이 2만 4000원까지 떨어지긴 했지만 베스트블레테렌 12는 언제나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맥주였다.
이런 까닭으로 자연스럽게 성 식스 투스 수도원은 이번 여행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베스트블레테렌을 다녀온 사람들의 무용담은 기대를 더욱 부추겼다. 인자한 미소를 띤 늙은 수도사가 수도원에서만 허락된 신비의 맥주를 건네는 상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로망이었다.
▲ 사람들로 가득한 인 데 브레데 |
ⓒ 윤한샘 |
▲ 베스트블레테렌 블론드 |
ⓒ 윤한샘 |
베스트블레테렌은 시그니처 병으로 유명하다. 마치 목도리를 두른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맥주병에 라벨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맥주 종류는 라벨이 아닌 뚜껑의 색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병마다 라벨이 붙어 있다. 아마 정책이 바뀐 모양이다. 동그란 라벨은 나름 키치 했지만 예쁘지는 않았다. 로고가 어설프게 박힌 라벨이 오히려 맥주의 아우라를 앗아간 듯 보였다.
▲ 베스트블레테렌 8 |
ⓒ 윤한샘 |
▲ 베스트블레테렌 12 |
ⓒ 윤한샘 |
성배처럼 생긴 전용 잔에 천천히 따르자 고혹적인 흑색 위로 아이보리 색 거품이 풍성하게 올라왔다, 이윽고 건자두 향이 묻은 다크 초콜릿, 섬세한 볶은 견과류, 알코올의 따스함이 코와 입을 물들였다. 묵직한 바디감이 혀 위에 눌러앉는 순간, 압도적인 균형감과 복합성으로 입에서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한 병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알딸딸한 기운이 얼굴에서 느껴졌지만 어느덧 잔에는 새로운 12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베스트블레테렌에 왔지만, 한편으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과도한 이익을 막기 위한 유통 제한과 소량 생산이 오히려 이곳을 더 시장통으로 만들고 있었다. 고즈넉한 수도원을 바라보며 베스트블레테렌 12를 즐기는 상상은 일찌감치 깨졌다. 혁명을 파는 일이 더 부각되고 각광받는 자본주의의 아이러니를 베스트블레테렌에서 체감하다니. 한 편으로는 트라피스트 맥주의 진정성이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깨닫는 기회기도 했다.
▲ 덩케르크 해변 |
ⓒ 윤한샘 |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전쟁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적이었다. 1940년 5월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선을 뚫은 나치는 순식간에 연합군을 괴멸될 위기로 내몰았다. 덩케르크 해변에는 수십만 명의 군인들이 포위된 채 갇혀있었다.
▲ 덩케르크 기념비 |
ⓒ 윤한샘 |
지평선을 물고 내려가는 태양 옆으로 등대가 있는 방파제가 보였다. 영화에서 탈출을 위해 수만 명의 군인들이 서 있던 곳이다. 독일 군의 공중 폭격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유일하게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때도 노을은 방파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겠지. 막다른 순간에 구조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 평범한 일상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상념에 젖었다.
▲ 노을이 지는 덩케르크 해변. 멀리 방파제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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