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제 5도살장 | 작센 왕궁의 피를 담은 항아리… 그 이름은 중국산 청화백자이어라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11. 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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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진열된 수많은 이국의, 그리고 작센의 아름다운 자기를 일일이 열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요한 게오르크 카이슬러의 <드레스덴 여행기> 中

“드디어 드레스덴 !!!”

독일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도시! 드디어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독일뿐이랴. 전 유럽에서 단 한 곳을 고르래도 단연 ‘드레스덴’. 이곳에 진열된 수많은 이국의, 그리고 작센의 아름다운 자기를 보기 위하여!!! 드레스덴은 ‘차’와 ‘다구’에 관심 있는 이라면 꼭 직접 가보고 싶고 두눈으로 보고 싶어 할 유럽 도시 중 첫손에 꼽힌다. 드레스덴이 대체 어떤 곳이기에?

1890년대 드레스덴 모습을 찍은 사진. 엘베강을 가로지르는 아우구스투스 다리 건너 드레스덴의 아름다운 명소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드레스덴은 독일을 남북으로 뚝 잘라 가운데 금을 쭈~욱 그으면, 그 금의 맨 오른쪽 즈음에 위치해 있다. 통일독일 이전 동독에 속했던 드레스덴과 관련 가장 유명한 문구는 ‘드레스덴 공습’이 아닐까. ‘차’와 ‘다구’와 ‘드레스덴’을 연결짓는 이는 아주 극소수일 터. 드레스덴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공습으로 인해 거의 전멸 지경에 이르렀고, 통일 이후 가까스로 복원된, 건물들도 그래서 거뭇거뭇한,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도시’ 쯤 될 테다.

1945년 2월 연합군은 드레스덴 공습을 결정한다. 1945년 2월 13일부터 사흘간 드레스덴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연합군 폭격기 527대가 4000톤의 폭탄을 들이부어 작센 왕국의 수도를 지옥으로 만든다. 당시 3만~4만명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폭격으로 폭삭 무너진 드레스덴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동독은 오래도록 방치했고, 통일 후 독일은 대대적으로 드레스덴 재건을 진행했다. 드레스덴의 더없이 빛나던 문화유산이 폭격에 무너져 내린 것을 안타까워하던 드레스덴 시민들은 혹시 몰라 남은 돌을 폐허에서 주워 몇 개씩 집에 간직했고, 재건 때 시민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오던 돌을 재사용했다. 드레스덴의 수많은 건축물에 폭격의 흔적인 검은 그을림이 선명한 이유다. 예전 돌을 재사용한 부분은 검게 그을려 있고, 새로 돌을 마련해 쌓아 올린 부분은 상대적으로 깨끗해 흑백의 묘한 조화가 두드러지는 건물도 꽤 있다.

재건 후 연평균 170만 명이 찾는 독일의 관광도시로 우뚝 선 드레스덴은 원래 ‘작센’이라 불렸던 왕국의 주도였다. 영어로는 ‘색스니(Saxony)’라 표기하는데, 이 색스니의 독일식 발음이 ‘작센’이다.

동북쪽으로는 폴란드, 동남쪽으로는 체코와 국경을 마주 대고 있는 드레스덴은 도시 한가운데 체코에서부터 흘러내려 온 엘베강이 흐른다. 엘베강을 사이에 두고 강 북쪽이 신시가, 강 남쪽이 구시가다. 신시가 쪽에서 엘베강 건너를 바라보면 드레스덴의 상징인 츠빙거궁, 젬퍼오퍼(오페라하우스), 가톨릭 교회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환상 뷰’가 펼쳐진다. (강폭이 넓지 않아 다리를 걸어서 건너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도기는 800~1000℃, 자기는 1100~1500℃에서 구워
얇고 단단하며 빛이 나는 자기 비싸고 귀해 ‘하얀 금’으로 불려
엘베강 남쪽 강변에는 벤치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데 이곳은 예부터 ‘유럽의 발코니’라 불렸다. (하인리히 폰 브륄이 1737년 인근 궁전, 도서관, 정원 등을 설계했기에 ‘브륄의 테라스’라고도 불린다.) 이 같은 엘베강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작센주 주도로서 일찌감치 화려하고 찬란한 건축물과 문화유산이 많았던 덕에 드레스덴은 ‘독일의 피렌체’로 이름이 높았다.

작센왕국은 한때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권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지배권도 확보했을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다. 그 강성했던 시절을 이끈 황제 중 한 명이 ‘강건왕’이라 일컬어지는 아우구스투스 2세(Augustus the Strong, 1670~1733년)다. 프랑스 루이 14세를 동경하며 ‘절대왕’을 꿈꿨던 그는 베르사유궁전을 모방해 드레스덴에 츠빙거궁을 건설했고 모든 아름다운 것을 동경했다. 드레스덴궁에 ‘그린볼트’라 불리는 보석박물관이 있는 것도(‘그린볼트’ 최고 수장품인 ‘드레스덴 그린’은 무려 ‘41캐럿’ 녹색 다이아몬드 장식이다.) 츠빙거궁 한편에 뜬금없이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로 가득 찬 도자기 박물관이 있는 것도 모두 아우구스투스2세 덕분이다.

드레스덴 츠빙거궁 ‘도자기박물관’에서 작센의 왕이었던 아우구스투스 2세가 수집한 3만 5000여 점의 도자기와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잠깐상식 하나. 모든 그릇을 다 도자기라 부르는 것은 아니다.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가 합쳐진 단어다. 800~1000℃ 온도에서 구운 것을 ‘도기’, 1100~1500℃에서 구운 것을 ‘자기’라고 한다. 더 높은 온도에서 구웠으니 그만큼 더 단단할 것은 당연지사다. 도기는 만들기 쉽다. 이미 고대 이래로 세계 전역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투명하고 밝은 빛을 내는 데다,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는가 하면, 얇으면서도 단단한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15세기까지도 중국과 한국이 유일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고간 도공 덕분에 16세기 들어서야 처음으로 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자기를 만들지 못했다. 우선 불 온도를 1500℃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을 몰랐고, 어떤 흙과 원료를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부자는 은이나 동으로 만든 그릇을 썼지만 은은 색이 잘 변하고 동은 쉽게 녹이 나 관리가 어려웠다. 값도 비쌌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기나 나무로 만들어진 식기를 썼다. 나무그릇은 투박하고 도기는 물이 스며들고 튼튼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은이나 동식기에 뜨거운 차를 부으면 너무 뜨거워 잡기도 힘들었고, 도기는 차의 뜨거운 온도를 버티지 못해 터져 나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나무 식기에 차를 마시기에는 너무 없어 보였을 터. 그런 상황에서 차를 부어도 아무렇지 않은 자기를 만났으니 ‘한눈에 뿅~’ 간 것은 당연지사. 자기를 알게 된 유럽 사람들은 자기를 ‘백색의 황금’이라고 부르며 열광했다.

그저 얇고 단단하고 빛이 나는 데다 맑은 소리만 나는 것도 아니었다. ‘코발트’라는 안료를 사용했다는, 푸른색의 그림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 ‘청화백자’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당시 청화백자로 방을 꾸민다는 건 최고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소장한 1m 높이 청화백자 화병을 작센 공국 아우구스투스 2세가 자신의 기마병 600명과 바꿨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한 궁정학자는 ‘작센 왕국의 피를 담은 항아리’라 하며 한탄했다나 어쨌다나~.

츠빙거궁 ‘도자기박물관’ 소장품들.
중국과 일본 도자기에 푹 빠진 아우구스투스 2세는 아시아를 오가는 상인들이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가져오는 족족 다 사들였고, 죽기 전까지 3만5000점 넘게 모았다. 그 소장품을 지금 츠빙거궁 한편에 자리한 ‘도자기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일반인은 평생 하나 만나보기도 힘든 명, 청 시대 자기는 물론 17~18세기 화려한 자기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 “도대체 아우구스투스 2세의 부는 어느 정도였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보석 하나만 모으기도 쉽지 않을 판에, 어쩌면 보석보다 더 비쌌을 도자기를 모으는 호사 취미를 갖고 있던 아우구스투스 2세는 늘 돈에 쪼들렸다. 그런 아우구스투스 2세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바로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라는 이름을 가진 연금술사와의 만남이다.

프로이센에서 “쇠를 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치다 ‘뻥’이 들통날 위기에 처한 뵈트거는 당시 작센으로 몸을 피신해 있었다. 그 뵈트거를 만난 아우구스투스 2세는 “내 밑에서 자기를 만들어내면 살려주고, 그렇지 못하면 프로이센에 돌려보내 죽음에 이르게 하겠다”고 뵈트거를 위협한다. 뵈트거는 이제 금 대신 자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 2세는 뵈트거를 드레스덴에서 30㎞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 마이센의 ‘알브레히츠부르크성’에 가둬놓고 자기를 만들어 내라 닦달했다.

작센왕 연금술사 마이센 성에 가둬놓고 “자기 만들라” 명령
1708년 드디어 자기 제작에 성공… ‘마이센’ 스토리의 시작
그런데 이게 웬일. 마침 작센과 헝가리 국경 근처에 고령토가 나는 땅이 있었다. 그 고령토를 이용해 1708년 뵈트거는 드디어 자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유럽 최초의 자기가 만들어진 ‘마이센’의 영광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렇게 시작된 ‘마이센’ 자기는 지금도 ‘유럽 도자기계의 에르메스’로 불린다. 덴마크 ‘로얄 코펜하겐’은 ‘마이센’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마이센 자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유럽 귀족들은 중국 자기를 수입해와 거기에 차를 마셨다. 손잡이 없는 중국 잔으로 차를 마시는 귀족들의 한때를 묘사한 그림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중국산 청화 자기로 차를 마시는 가족을 그린 ‘차를 마시는 영국인 가정’. 조셉 반 아켄(1727년 作).
끝내 도자기를 만들어낸 뵈트거는 이후 영광을 찾았을까. 천만의 말씀. 아우구스투스 2세는 뵈트거를 비롯해 함께 연구한 사람들을 끝끝내 마이센 알브레히츠부르크성에 감금하고 죽도록 도자기만 만들게 했다. 자기를 만드는 비법이 새어나갈까 우려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기를 만들어내는 족족 비싼 값에 팔 수 있었기에 작센 왕국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한두 명씩 탈출에 성공하는 이가 생겼고 그들을 통해 마이센 자기 제작법이 전 유럽으로 전파됐다.
그래서 오늘의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 등을 만든 스타 영화감독 조지 로이 힐 감독의 <제5도살장>이다. 커트 보니것이 쓴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코넬대를 다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작가는 실제 드레스덴 대공습 현장에서 살아남았고 그 스토리를 고스란히 <제5도살장>에 담았다.

뉴욕 태생인 주인공 빌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벨기에 전선에 투입된다. 하지만 대오에서 낙오한 빌리는 독일군 포로로 잡히고 나치가 포로들을 대량 살육할 목적으로 지은 대규모 수용소에 갇힌다. 그 수용소 이름이 바로 ‘제5도살장’이었다. <제5도살장>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보니것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드레스덴 폭격은 전쟁을 끝내지도, 독일군을 약화시키지도, 포로들을 구해내지도 못했다. 그 폭격으로 이익을 본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게 누구죠?”

“바로 나예요. 이 책을 써서 큰 돈을 벌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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