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압류 딱지' 보고 다짐했건만... 근데 피할 수가 없었다
[권성훈 기자]
'빚 때문에 생긴 일' 공모명을 봤을 때 딱 떠오르는 생각은 이거였다. '나 빚 없는 데?', 그런데 금방 깨달았다. '아 참, 나 빚 있지!'
등 뒤에 배낭을 메고 있다 보면 그 배낭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은 이럴 때 가능한 것 같다. 배낭의 무게가 비교적 가볍고 오래 메고 있어 의식하지 못하게 된 상황. 지금 내가 가진 빚이 바로 그런 경우인 듯하다. 작은 아파트 한 채에 붙어 있는 30년 모기지, 누군가에는 적은 돈이고 누군가에게는 많은 돈인 매월 수십여만 원을 30년 동안 갚아야 한다. 이 빚은 내 삶의 일부이고 그나마 감당할 수 수준이다 보니 가끔은 이게 빚이란 사실을 잊어버린다.
혹자는 '여유가 있나 보네'라고 슬쩍 비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난 빚이 주는 고통을 시쳇말로 '이가 갈리게' 경험한 사람이디. 내가 만들지 않은 빚과 내가 만든 빚에 평생 시달렸고, 사실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혹자들의 비아냥을 충분히 이해한다.
▲ 빨간 딱지. |
ⓒ Pickpik |
내 사춘기는 '빨간 딱지'와 함께 시작했다. 1979년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이 며칠 안 남았던 그 날, 학교 방과 후 도착한 우리 집에 어두운 제복을 입은 낯선 어른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나를 흘낏 보고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애가 쓰는 건 좀 안 보이는 곳에 붙여. 텔레비전도 앞쪽에 붙이지 말고 뒤쪽에 붙이고. 아주머니~ 아드님은 어디 나가 있다가 오라 하시죠."
아마 그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대문 밖으로 나온 뒤 나는 어딘가에 가 있다가 저물녘 집에 돌아 간듯하다. 40여 년 전 일이라 당시의 '충격'만 서늘한 느낌으로 마음 저 깊숙한 곳에 남아 있을 뿐, 구체적 상황은 희미해져 떠올리기 어렵다. 확실한 정황은 당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 우리 집이 큰 빚을 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때 그 제복의 어른들은 통상 '집달관'이라 불리는 '집행관'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일은 기나긴 고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집달관'이 다녀간 뒤, 우리 집은 사라졌다. 그 뒤 더 작고 더 낡은 전세로 이사 다녀야 했고, 1차 압류로 다 털어가고 남은 집기도 아쉽다는 듯 집달관들이 또다시 나타나 빨간 딱지를 붙였다. 가끔은 예전 아버지 회사 직원들도 집에 들어와 원망 섞인 피눈물을 한 양동이 흘리고 갔다. 그렇게 우리 집은 희망도 미래도 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난 그때 느꼈다. 빚은 독이란 사실, 그것도 한번에 사람을 죽이지 않고 천천히 말려 죽이는 아주 지독한 독이란 사실을 말이다.
'고진감래'라고 하던가. 빚더미에 치어 모두 말라 죽을 날만 기다리던 우리 집에도 작은 희망의 불빛이 비쳤다. 언제나 실패만 거듭할 것 같은 아버지의 사업이 칠전팔기 끝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우리 집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때 난 20대였다. 12살 때 시작된 이 지옥이 끝나기까지 십수 년이 걸린 것이다.
성인이 된 내게 '빚'은 절대 먹으면 안 되는 금단의 사과였고 절대 열면 안 되는 판도라 상자였다. 그러나 모두 아는 바와 같이 금단의 사과는 신의 엄중한 당부에도 아담과 이브가 따 먹었고, 판도라의 상자는 제우스의 경고에도 판도라가 열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 10월 29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은행에 대출 금리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
ⓒ 연합뉴스 |
그때나 이때나 내 집 마련을 빚 없이 현금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06년 난 수도권 아파트를 30년 모기지로 분양받았다. 내 어린 시절 기억 대부분을 고통으로 점철한 그 무서운 '빚'을 낸 것이다. 그렇게 난 금단의 사과를 먹었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당시 기준 금리는 4%대였다.
당시 난 이런저런 일로 회사원에서 자영업자로 인생 2막을 열었던 시점이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큰 모험을 한 것이다. 그나마 최초의 사업은 운이 좋았다. 생각보다 장사가 잘돼서 60여만 원만의 이자를 거치 기간 중 꼬박꼬박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원금까지 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원금에 이자까지 매달 은행에 지불해야 하는 돈이 100여만 원에 이른 것이다. 더욱이 변동 금리가 오르며 5%에 진입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본격적으로 허리띠를 조여야 했다.
첫 번째 장사의 운은 5년 만에 끝났다. 가게 상권 중 일부가 재개발에 들어간 것이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생 3막을 시작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돈이 있었지만 새로운 사업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란 금액은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망설여졌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높았던 금리에 부대껴 봤던 난 이번에는 최대한 은행 대출을 받지 않으려고 애썼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무너졌던 국내 부동산 경기는 2011년 막 기지개를 켜던 시점. 서울에 바로 인접한 경기도 모 지역의 전세 시세보다 당시 인천 신도시의 전세 시세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에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 차이가 같은 평수에 1억 원 차이가 날 정도로 상당했다. 난 이 상황을 이용했다.
전세 시세 차이를 이용해 난 인천에서 새로운 외식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난 빚은 최대한 줄여 그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자영업 중 가장 치열하다는 '외식 자영업'이라는 새로운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몰랐다. 지인들은 지금도 가끔 내게 "갭 투자는 장사가 아니라 부동산에 했어야지"라고 핀잔을 준다.
장사가 잘됐다면 그게 농담 같은 핀잔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사업은 그러지 못했다. 전세 시세 차액에 의한 갭투자라 이자와 원금에 대한 부담은 덜했지만,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저금리로 '빚을 내서 집 사라' 정부 정책 기조에 전국적으로 전셋값이 폭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 상황은 내게 더 가혹했다. 인천처럼 시세가 바닥을 찍은 곳의 상승률이 더욱 거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전세 갱신 때마다 수천만 원에서 심지어 1억 원씩 오른 전셋값을 빚으로 메워야 했다. 그조차 깡통 아파트였다. 더욱이 장사마저 안 되는 상황이라 소위 말하는 '마이너스 통장', 즉 고금리 신용대출로 모자란 생활비도 메워야 했다. 그야말로 빚에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빚에 치이며 '난 절대 빚은 지지 않으리라'라는 각오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제는 내가 진 빚에 내 자식들이 치이는 상황이 됐다. 맏이가 대입을 앞두고 학원에 가고 싶어서 했지만, 난 막아야 했다. 둘째가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할 때 그것도 난 두 손 들어 막아야 했다. 물론 맞벌이 아내의 처절한 노력으로 둘 모두 우여곡절 끝에 원하는 곳에 진학은 했지만, 난 자식들 마음 속 소리 없는 원망을 들을 수 있었다.
소중한 집을 포기하다
2015년 난 집을 팔았다. 아니 집을 포기해야 했다. 사업을 정리하며 남은 부채를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 영혼을 팔아서라도 장만한다는 아파트를 난 피눈물을 흘리며 포기했다. 이때부터 나는 단기 노동자와 주변 지인들 사업에 참여하는 등 이제 장사가 아닌, 투잡 노동자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내게 남은 부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가족은 매주 간단한 외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교육비로 생계는 여전히 빠듯했지만, 난 정말 오랜만에 정신적 평화를 찾았다.
그런데 이 평화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전셋값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2018년 이번에는 아버지의 빚보증 문제까지 터졌다. 30여 년을 거주한 부모님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어린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그 빨간 딱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 계산기. |
ⓒ pexels |
난 한정 상속으로 아버지 부채를 정리했다. 현재 상황을 채권자들에 통보하고 설득하는 피 말리는 과정에 6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다행히 전셋값이 떨어지며 난 전세 대출을 갚을 수 있었다.
2023년, 현재 난 다시 잠시 평화를 찾은 듯하다. 그동안 날 직간접적으로 괴롭혔던 아버지 부채도, 그리고 내 사업 부채도 전세 대출도 없다. 다만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대출을 끼고 장만한 작은 아파트를 물려받아 갑자기 빚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부부가 감당할 수준이다.
난 빚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할 뿐이다. 이제 성인인 내 자식 중 첫째는 직장인이고 둘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난 가끔 내 자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빚 없고 건강하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빚이 너희를 살리는 약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과해도 너희를 죽이는 독이 된다는 사실 절대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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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빚 때문에 생긴 일' 공모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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