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도 수탈, 불편한 역사 어떻게 봐야할까

완도신문 정지승 2023. 11. 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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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혼돈은 지역가치 상실로 이어져... 빼앗기지 않으려면 역사의식 갖춰야 해

[완도신문 정지승]

 장수도 수탈
ⓒ 완도신문
전남 완도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이 됐다. 조선시대부터 350여 년 동안 이어진 하의3도의 농지탈환운동인 소작항쟁은 1923년 시작해 일제강점기 식민수탈에 맞서 승리를 거둔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역사다. 

식민수탈로 소작료가 4할에서 8할로 올라가자 암태도 주민들은 소작인회를 조직해 일본에 항거했다. 당시 노동단체, 언론단체 등과 연대해 소작료 인하를 끌어냈다. 이것이 1920년대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농민운동으로 전국적인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완도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소안면 당사리 마을 입구에는 '김석주영세불망비'가 있다. 1973년 8월 15일 당사도 주민들이 광복절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당사도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해남에 거주한 천모씨의 개인 섬이 됐다. 

당사리 주민들이 소작생활을 했던 것인데, 섬을 되찾기 위해 김석주 옹이 주민들과 7년 동안 차근차근 돈을 갚아가며 마을의 재산으로 만든 것이다. 바람을 막아주던 마을의 큰 후박나무를 베어다 팔아서 돈을 마련했고, 1941년 8월 15일 당사도는 완전히 주민들의 소유가 됐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공덕비는 현재 당사리 김미화 이장의 조부였던 김석주 옹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것.

김 이장은 "당사리 주민들이 소작생활을 하면서 산속 깊은 곳에 작은 터만 보여도 몰래 개간해 농사를 지은 이야기를 선친에게 들었다"며 마을에 전해온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장수도 역시 마을의 소유로 여겼고, 주민들은 돛배를 타고 그 섬에서 미역 등 해초를 채취해 경제활동을 이어갔다"며 당사리 1번지 섬으로 여겼던 장수도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마을의 역사를 꿰고 있는 최민재 노인회장을 모셔와 장수도와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다. 최씨는 어린 시절 부친이 돛배를 끌고 장수도에 가서 해초를 채취해온 일들을 모두 기억했다. 그가 20대 되면서 당사리 마을 사람들은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소가 큰 재산이 된 때라서 많게는 7마리를 사육한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소를 기르는 주민이 늘어나자 당사도에 소먹이가 부족해서 수시로 장수도에 가서 꼴을 베어다가 힘겹게 소를 키웠던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대대로 살아온 당사도와 주민들이 수시로 이용한 1번지 섬 장수도는 왜 남의 소유가 됐을까? 그 이유는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1919년 일제의 무단통치가 있었고, 1920년~1936년 문화통치를 거쳐 1937년~1945년 민족말살통치의 시대로 이어진다. 앞서 1910년 8월 29일 병합조약이 있었다. 칙령 제318호로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우리나라를 조선으로 개칭한 일본은 한국통감부를 대신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부는 천황에게 직속되어 총독 아래 5부 9국의 체제를 갖추고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대장들 가운데 총독을 임명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 위임에 따라서 총독의 명령과 그에 따르는 벌칙도 내릴 수 있었다. 도쿄의 제국의회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한 독자적인 정부로 사실상 내각총리 대신 가는 제2인자의 요직이었다. 독자적 정부의 기능을 한 것은 총독에게 무한한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 일본은 우리를 지배하면서 제국헌법을 적용하는 대신 천황의 권한으로 규정된 '천황대권'을 총독이 위임받아 통치하는 형식을 취했다. 

당시 천황대권은 행정, 입법, 사법, 군 통수권까지 모두 포괄했다. 이를 위임받은 총독의 권한은 사실상 부왕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총독은 우리나라에 주둔한 육해군 부대를 통솔했고, 필요시 만주 지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이 총독에게 주어진 것.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한국통감부의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총리대신을 포함하여 총리직을 세 번이나 역임하고 부임하기도 했다. 총독은 9대 까지 이어졌다. 1910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시작으로 토지조사가 실시되었고, 2대 총독이었던 야마구치현 출신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토지사업을 완료했다. 

그는 우리나라 토지수탈을 완료한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을 무력 탄압한 이유로 일본에서도 비판을 받아 3년 만에 교체됐다. 한국통감부 당시 통감부의 임시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선대로 근무한 경력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일본에게 있어서 대륙 진출의 지정학적 핵심지인 우리나라의 가치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군부의 집착도 그만큼 심했다. 

1912년부터 1919년 까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일본이 토지수탈을 감행했고, 1918년 임야조사령이 시작된다. 이듬해 1919년 7월 10일자로 당사리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해 온 장수도는 추자면 예초리 산 121번지인 지도상에 이름도 없던 사수도로 임야대장에 등록됐다. 이 불편한 역사를 제주시는 감추는 모양새다. 그러면서 각계의 전문가를 대동해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고자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당사리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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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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