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간 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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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가 다시 창궐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며 불현듯 정민혁(가명)을 떠올렸다.
빈대는 오래전부터 인간 세상에서 극성을 부렸다.
그러나 곤충 빈대 말고 정민혁 같은 '인간 빈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평범한 인간을 괴롭힌다.
이런 인간 빈대 때문에 식당 자영업자는 요즘 가장 난이도가 높은 직업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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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가 다시 창궐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며 불현듯 정민혁(가명)을 떠올렸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다. 정민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소문난 빈대다.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 갔는데 한 번도 자기 돈을 쓰지 않았다. 만약 그 녀석이 샀다면 전교에 소문이 났을 텐데 그런 얘기는 들어보질 못했다. 대신 입구에 서 있다가 아는 친구가 나타나면 팔로 목을 감싸며 친한 척을 한다. 그러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내 거도 골라도 되지?” 한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주변 친구들은 죄다 정민혁을 못마땅해했다. 돈 아까운 건 둘째치더라도 이 녀석 빈대 붙는 꼴이 정말 밉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너 그렇게 살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달라질 리 없는데 내 입만 아플 거 그냥 말을 말자, 다들 이런 생각이었을 거다. 이게 26년 전 일이다.
빈대는 오래전부터 인간 세상에서 극성을 부렸다. 인간은 살충제를 살포하며 빈대 소탕작전을 벌였고 한국에서도 1990년대 들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곤충 빈대 말고 정민혁 같은 ‘인간 빈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평범한 인간을 괴롭힌다. 빈대 같은 인간의 에피소드는 수두룩하게 쏟아진다. 요즘은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주로 이들에게 피를 빨린다.
빈대 A는 초밥집에서 초밥을 주문하면서 서비스로 초밥을 달라고 했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배달의민족’(배민) 리뷰로 초밥집 사장을 위협했다. 빈대 B는 햄버거 가게에서 1700원짜리 감자튀김 1개를 시키며 케첩 10개를 요구했다. 집에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쓸 생각이었나 보다. 빈대 C는 스파게티를 서비스로 달라고 했다. 정작 그가 주문한 음식은 200원짜리 핫소스 3개였다. 배민은 지난해 자영업자 1289명을 대상으로 ‘가장 곤란한 손님’의 유형에 대해 물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당당한 사이드 메뉴 요청’(60.7%)이었다. 음식이 아까워서라기보단 당당한 태도가 밉상이었을 거다. 이런 인간 빈대 때문에 식당 자영업자는 요즘 가장 난이도가 높은 직업으로 꼽힌다. 생계 수단마저 포기하고 싶어 하는 자영업자가 많다고 하니 어쩌면 곤충 빈대보다 더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건 인간 빈대일지도 모르겠다.
빈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의 피를 빤다. 물리면 심하게 간지럽다고 한다. 오죽하면 사도 요한이 빈대에게 “오늘 밤만이라도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얌전히 있어 달라”고 간청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 빈대가 더 강력해져서 돌아왔다. 기존에 빈대 퇴치에 사용하던 피레스로이드계 성분 살충제는 강해진 빈대에게 더 이상 소용없어졌다. 빈대 박멸을 위해 꾸린 정부 합동대책본부는 새로운 살충제 사용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작전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당장 빈대를 몰아내더라도 더 강력해진 갑옷을 두르고 언제 다시 출몰할지 모를 일이다. 인류는 빈대 없는 세상을 실현하려고 애쓰지만, 빈대 역시 이에 맞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1962년에 펴낸 저서 ‘침묵의 봄’에서 경고했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정복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이쯤에서 난 인간 빈대에 대해 생각한다. 얻어먹는 데 익숙하고 항상 부탁만 하는 이들이다. 친밀함을 악용한다는 점에서 난 이들을 악랄한 존재로 여긴다. 타인의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거절이라도 하면 쩨쩨한 사람 취급을 한다. 결국 인간 빈대를 곁에 두면 속앓이를 피할 수 없다. 문득 올해 41세의 정민혁 근황이 궁금해졌다. 26년 전보다 얼마나 더 강력해졌을까. 인간 빈대 역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존재라면 결국 피하는 게 답이다.
이용상 산업2부 차장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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