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신뢰에요” “미스터 린튼”…안 한 것만도 못한 ‘구분짓기’ 영어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2023. 11. 1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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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최근 두 사람의 영어 표현이 화제다. 하나는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씨의 재혼 상대였던 전청조씨의 “I am 신뢰에요.” 다른 하나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을 향해 한 “미스터 린튼(Mr. Linton)”이다.

한쪽은 사기 혐의로 구속된 사람의 엉터리 영어이고 다른 쪽은 아이비리그 출신 정치인의 문법을 갖춘 영어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다.

불필요한 영어, 반감만 일으켜

첫째, 쓸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굳이 썼다는 점, 둘째, 그로 인해 비웃음이나 비난 등 역효과를 일으켰다는 점, 셋째, 둘 다 ‘구분짓기’를 위해 사용된 영어라는 점이다.

전씨가 문법도 맞지 않게 영어를 섞어 쓴 이유는 “뉴욕으로 유학 가서 승마 선수를 한 재벌가의 숨겨진 3세” 행세를 하기 위해서다. 이게 영화였으면 ‘너무 상투적인데?’라고 했을 것이다. 사기 치는 사람이 ‘유학’과 ‘영어’를 동원하는 건 봉준호 감독의 블랙코미디 ‘기생충’(2019) 등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온 설정이니 말이다. 하지만 전씨 사건으로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게 재확인됐다.

「 영어를 능력의 상징으로 착각
전청조는 ‘계급적 허세’ 드러내
이준석은 은연중에 인종차별
한국 사회의 배타성 돌아봐야

지난 4일 부산에서 열린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왼쪽 뒷모습)의 토크에 참석해 경청 중인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오른쪽). [연합뉴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사회학자 최샛별 이화여대 교수는 논문에서 한국사회가 “영어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넘어서 그 자체가 ‘능력’이자 (…) 계급적 차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적용해서 보면, 한국에서 영어는 강력한 문화자본이며 엘리트 계층이 다른 계층으로부터 ‘구분짓기(distinction)’하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상류층을 가장하기 위해 영어를 쓰는 사례가 계속되는 것이다. 비록 전씨의 경우에는 그 영어가 너무 허술해서 웃음거리 유행어가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한국만 이런 건 아니다. 영어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과거에 교양 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려면 불어가 필수였다. 19세기 영국 고전문학 『제인 에어』를 보면 거만한 귀족 잉그램 남작부인과 그 딸이 오로지 영국인만 있는 자리에서 모녀끼리 굳이 불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불어는 완벽했지만 그 쓸데없는 사용은 잘난 척과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외국어 사용이 계급적 ‘구분짓기’라면, 이준석 전 대표가 지난 4일 그의 부산 토크쇼에 찾아간 인요한 혁신위원장과의 면담을 영어로 거절한 것은 인종적 ‘구분짓기’로 여겨져서 더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전 대표는 “You became one of us but you don’t look like one of us as of now(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됐지만, 아직은 우리 일원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등 여러 말을 영어로 했다.

2021년 3월 미국 애틀랜타 아시아계 대상 총격 사건 당시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다룬 CNN 방송과 인터뷰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K팝 가수 에릭 남. [유튜브 캡처]

연세대 의대 교수인 인 위원장은 서구인 외모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자칭 ‘순천 촌놈’이다. 독립유공자 조부, 6·25 참전용사 부친 등 대를 이어 한국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귀화 1호’에 올랐다. 한마디로 한국인이다. 그런 그에게 굳이 영어를 쓴 것은 “‘너는 우리 국가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이며 (금태섭 전 의원 신당의 곽대중 대변인), “노골적으로 상대를 외국인 취급하는 배타적 행위”(정의당 이재랑 대변인)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정치권 바깥에 있는 나종호 예일대 교수의 일침이 반향이 컸다. “평생을 미국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 2세에게 한국계라는 이유로 미국의 유력 정치인이 공개석상에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그것도 비아냥대면서 했다면 그 사람은 인종차별로 퇴출입니다.”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 출신 윤희숙 국민의힘 전 의원도 “미국에서라면 진짜 퇴출”이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둔감한 행위라면서 이 전 대표의 사과를 촉구했다.

“인종차별은 과도한 프레임”이란 반박도 있다. 그러나 한국계 미국인 인기가수 에릭 남의 경험에 따르면 인종차별은 극단적인 혐오범죄뿐만 아니라 일상적이고 미묘한 형태로도 벌어지며 그 또한 피해자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는 지난 2021년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다룬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애틀랜타가 고향인데 종종 “어디 출신인가” “영어를 어디서 배웠냐” 등의 질문을 받는다며 그럴 경우 “나는 여기에 속하지 못하나? 내 정체성은 뭐지?”라고 느끼게 된다고 했다. 영어 면박을 들었을 때 인 위원장의 심정도 똑같았을 것이다. 실제로 인 위원장은 “엄청 섭섭했다”라고 밝혔다.

이 전 대표가 이후 ‘실수했다’고 사과했으면 논란은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종차별 비난에 “어이가 없는 상황”이라며 인 위원장의 “언어 능숙치”를 고려해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 영어로 말했으며 “정중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미스터 린튼’이 아니라 ‘닥터 린튼’

그의 영어가 과연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했는지에는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기자도 영어신문 경력 20년에 영국 유학을 다녀오긴 했으나 늘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뉘앙스”를 전달하는 영어를 “정중하게”하고 싶었다면 시작부터 ‘미스터 린튼’이 아니라 ‘닥터 린튼(Dr. Linton)’이어야 했다는 지적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영미권에서 상대가 의사인 걸 뻔히 알면서 ‘닥터’가 아닌 ‘미스터’라고 몇 번씩 부르는 것은 두 가지 경우뿐이다. 첫째, 기싸움을 하며 상대를 얕잡아볼 경우. 둘째, 영어 “뉘앙스”를 잘 몰라 실수한 경우. 이건 할리우드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장면이라 유학을 가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논란은 생산적인 면도 있었다. 아직도 ‘단일민족’이란 환상이 남아있는 우리에게 한국은 다민족국가이며 우리도 은연중에 인종차별을 저지를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인 위원장처럼 푸른 눈의 한국인뿐만 아니라 어두운 피부의 한국인에게 인종차별적 언행을 한 적이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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