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초입, 헛헛함 위로해줄 이 사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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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기자]
▲ 이세종 생가 마을 등광리 도암저수지(등광제)에서 본 등광리. 가운데 산이 개천산, 좌측이 천태산이다. |
ⓒ 김재근 |
가을이 떠난 자리에 겨울이 들어섰다. 며칠 전 낙엽비가 내렸다. 뒤따라 찬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힘겹게 붙어있던 단풍잎 몇 잎 훑고 지나갔다. 들판의 억새꽃마저 바람에 날리고 나면 쓸쓸함만 남을 듯하다. 옷을 몇 겹 껴입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쓸쓸함이다.
며칠 전 읽은 기사가 떠올랐다. 11월 3일자 화순저널 문화면에 이세종 이야기가 실렸다. <화순 기독교 성자, 이세종 선생 삶 심도 있는 연구 이뤄져야>라는 제목이었다. 민중과 더불어 살기 위해 모든 소유를 나눠주며 청빈을 행동으로 실천하신 분이라 소개했다. 그 삶을 따라가 보았다. 필자가 이세종 관련 학술대회에 참여하고, 또 생가 앞 그를 기리는 표지판 내용을 보고서 이를 종합해 그의 삶을 정리해본 것이다.
'도암의 성자라 불리는 이공(李空) 이세종(李世鐘)은 1879년 전남 화순군 청풍면 신리 새터마을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아홉 살에 머슴살이를 시작하였다. 동냥글로 한글을 깨우쳤다.
30세에 같은 동네 14세 된 문제남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하고 형들이 사는 도암면 등광리로 이사를 했다. 악착같이 일했다. 40대에 100여 마지기 전답을 소유하였다. 부지런함과 성실함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자식을 갖지 못했다. 산당(山堂)도 짓고 굿도 했다.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우연이었다. 친지의 집에서 성경을 보았다. 독학으로 깨우쳤다. 이후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스스로를 '이공(空, 빈 껍데기)'이라 불렀다. 절제된 삶을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동식물까지도 지극한 생명으로 보살피는 삶을 실천했다.
▲ 등광리 입구 화순읍에서 운주사 가는 길에 도암면 지나고 차로 5분쯤 가면 좌측으로 성자이세종 생가 표지판이 보인다. 우측이 개천산, 중앙이 천태산이다. 우측 끝 멀리에 도암저수지(등광제) 둑이 희미하게 보인다. |
ⓒ 김재근 |
입동(立冬)인 지난 8일, 오후 세 시의 햇살이 투명했다. 도로 위에서 은빛 모래처럼 반짝이며 통통 뛰었다. 헛헛한 마음에 연탄 한 장 들이는 기분으로 도암의 성자라 불리는 이세종(李世鐘)을 찾아 나섰다.
길 안내 네비게이션이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음촌길 11-5(등광리 187)이라고 안내했다. 화순읍에서 출발하여 운주사 가는 길, 도암면을 지나 얼마 안 되어 좌측에 안내판이 나타났다. 생가(生家) 2.1km.
▲ 등광리 가는 길 우측이 도암저수지(등광제)이다, |
ⓒ 김재근 |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햇살이 내려앉고 간간이 바람이 지났다. 다리를 건너니 동굴 같은 가로수 길이다. 오르막이 끝나고 펼쳐지는 고요한 풍광. 도암 저수지(등광제)의 조용한 유혹에 굴복하여 저수지 둘레길을 걸어 마을로 갔다.
▲ 등광교회 마을에 들어서면 정면 언덕 위에 있다. |
ⓒ 김재근 |
▲ 이세종 생가 사진 우측 담장 밖에 등광교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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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은 1906년 문재임(1892~1971)과 혼인하고 그해 초겨울 이곳으로 왔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39년 양자 이금에게 집을 물려주고, 화학산 도구박골로 들어갔다. 1994년 한영우가 이 터를 다시 샀다. 폐가가 되었다. 2015년 '문화재예방관리센터'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등광교회로 갔다. 생가에서 보면 한집 건너인데 빙 둘러 가는 길은 한참이었다.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이세종의 영향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1936년 한문서당을 매입한 게 시작이었다. 전쟁 이후 팔렸다. 가정집을 기도터를 떠돌다 지금의 터에 1982년 자리잡았다.
▲ 등광교회 예배당 작아서 아름답다.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눈 덮힌 조그만 예배당’이 아마 이런 모습은 아닐까. |
ⓒ 김재근 |
너무 작아 평안한 예배당이다. 어릴 절 크리스마스에 갔던 교회가 추억처럼 떠올랐다.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눈 덮힌 조그만 예배당'이 아마 이런 모습은 아닐까. 예배당 몇 안 되는 의자는 창문 넘어온 햇살 차지였다. 따스함을 찾아 앉았다. 겨울 햇살은 잠깐이었지만 축복이라고 느껴질 만큼 따스했다.
▲ 예배당 내부 의자는 창을 넘어온 햇살 차지다. |
ⓒ 김재근 |
해를 가늠해 보았다. 기도터를 가기로 했다. 이세종이 자식이 없어서 자식을 낳기 위해 빌었던 산당이 자리했던 곳이다. 성경이 준 진리로 편안하게 된 후 자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산당을 헐어 기도터를 만들었다 한다.
교회를 나와 개천산을 올랐다. 길은 단정했고 적당하게 가팔랐다. 볼을 흐르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고 호흡이 짧아질 즈음 작지만 깔끔한 2층집이 나왔다. '이공님 기도터'라고 쓰인 간판이 없었다면 지나쳤을 그런 집이었다.
▲ 이정표 등광교회 앞에 있는 이정표 여기서부터 이공기도터까지 500미터. 이공기도터는 사진을 싣지 않는다. 이 사진으로 대신한다. |
ⓒ 김재근 |
한국전쟁 때 고아와 폐병 환자들을 보살피다 자신도 같은 병에 걸려 죽은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1964)과 나환우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방 최흥종(1880~1966)이 대표적이다. 그리스도 토착 사상가라 불리는 다석 유영모(1890~1981)도 생전 이세종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의 실천적 삶이 더 깊고 넓게 온 누리에 펼쳐지길 기원해 본다.
나는 특정 종교가 없고 종교에서 어느 편도 아니다. 크리스마스엔 예수의 사랑을 기억하고 초파일엔 부처의 자비를 떠올린다. 잠깐이지만 가난하고 힘든 자의 편에 서기도 한다. 이세종이 걸었을 길을 생각하며 그의 높고 맑은 정갈한 삶을 더듬어 보았다. 편안했다. 마음을 감쌀 덧옷 한 벌 얻었다. 겨울이 한결 따스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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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 화순저널에도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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