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은 왜 형의 비극을 외면했나

이준목 2023. 11. 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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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스토리 역사 스토리텔링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조선 17대 국왕 효종(孝宗) 이호(1619-1659)는 인조의 아들이자 소현세자의 동생이며,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병자호란이라는 전란과 청에서의 볼모 생활을 통하여 '명청교체기'라는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몸소 체험하면서, 낡은 체제에 머물러있던 조선의 한계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절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효종은 왜란과 호란으로 거의 무너져가는 듯 하던 조선의 역사를 이후 3백년 가까이 더 이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중흥군주'로도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형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적이고 미스터리한 죽음과 맞물려 효종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집을 남겼고, 훗날 그의 사후에도 '예송논쟁' 등 조선이 거대한 정쟁에 휩쓸리는 불씨로 남게된다.

조선 왕실의 어두운 역사

11월 8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 스토리텔링 <벌거벗은 한국사> 81회에서는 '병자호란과 왕세자의 미스터리한 죽음, 효종은 어떻게 형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나'편을 통하여 병자호란에서 효종의 즉위 과정까지 이어지는 조선 왕실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했다.

7살 터울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형제는 '인조반정'으로 아버지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국왕으로 집권하기전부터 사가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형제였다.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시절도 동고동락했던 각별한 사이였다. 소현세자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면, 봉림대군은 활달하고 씩씩했으며, 서로성격은 달랐지만 두 형제의 우애는 깊었다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여 조선이 청나라에 패배하고 인조가 홍타이지(청 태종) 앞에 나와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 강화도에 있다가 청군에 사로잡힌 봉림대군과,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수행하던 소현세자는 조선이 항복하며 아버지 인조가 청 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청나라는 항복 조건 중 하나로 소현세자를 인질로 잡아간 것을 비롯하여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자국으로 끌고 갔다. 후계자가 아닌 봉림대군까지 끌려간 이유는, 혹시라도 소현세자에게 변고가 생길 가능성을 대비하여 조선을 흔들 수 있는 또 하나의 패를 확보하려했던 것이다.

25세의 소현세자와 18세의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고단한 볼모 생활을 시작한다. 청나라는 세자의 수행원으로 따라왔던 조선인 관리중 반청 성향의 척화파 인사들을 두 왕자들이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처형하며 공포감을 불어넣었다. 또한 조선에 요구한 공물이나 지원이 늦어지면 수시로 세자를 찾아가 질책하고 압박했다고 한다. 청 황제 홍타이지는 연회나 사냥이 있을때마다 조선의 왕자들을 수시로 불러내 들러리로 삼기도 했다. 두 왕자에게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또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한창 전쟁중이었고, 조선 왕자들로 하여금 전쟁터에 함께 동행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전쟁터에 나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조선에 이어 중원의 패권국이던 명나라마저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여전히 막연한 사대주의와 반청감정에만 젖어있던 조선의 인식과 달리, 세상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접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1644년 5월, 명나라가 패망하고 청나라가 수도 북경을 점령하면서 마침내 중국대륙의 새로운 패자가 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청의 요구로 북경으로 이동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여기서 독일 출신의 천주교 신부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국적과 신분, 세대를 넘어 우정을 쌓았고, 소현세자는 샬을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과 신문물을 접하게 된다. 일부 학계에서는 소현세자가 이 시기에 시대의 변화와 더 넓은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서 '계몽군주'로서의 자질을 각성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해 11월,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섭정왕 도르곤은 약 8년만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선 영구 귀국을 허가했다. 그동안 청나라가 두 왕자를 볼모로 억류한 이유중 하나는 명과 조선의 내통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제 명이 패망하고 명실상부한 패권국이 된 청나라로서는 굳이 조선 왕자들을 잡아둘 이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두 왕자는 순차적으로 북경을 떠나 몇 달의 간격으로 꿈에 그리던 조선에 완전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소현세자에 이어 조선으로 돌아오던 봉림대군은 뜻밖의 비보를 듣게 된다. 먼저 조선에 도착했던 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부고였다. 1645년(인조 23년) 5월 21일,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귀국한지 석달로 되 지않은 시점이었다.

소현세자의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말라리아)이었다. 소현세자는 북경을 출발할때부터 몸상태가 좋지 않았고 추운 겨울에 긴 거리를 여행하면서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인조는 자신의 주치의이자 침술에 능한 이형익이라는 어의에게 소현세자의 병을 치료할 것을 지시했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으로부터 두 차례 침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두 번째 치료를 받은 다음날, 갑자기 소현세자가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러더니 그날 정오를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한다.

그런데 목격자들은 세자의 시신이 마치 약물에 중독된 상태 같았다고 증언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세자의 시신은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얼굴 덮개로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을 분변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실의 공식 역사기록에 버젓이 남은 소현세자의 비참한 최후 모습은, 그의 독살 가능성을 암시한다. 영화 <올빼미>에서는 이처럼 소현세자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이 잘 묘사되어있다. 

인조는 아들의 허망한 죽음을 듣고 통곡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후 인조의 행적은 의문투성이다. 왕조국가에서 일국의 왕세자가 치료를 받던중 급사한 사건인 데다 심지어 의료사고의 의혹까지 있는만큼 담당의가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형익을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심지어 소현세자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라고는 믿을수 없는 인조의 행적은 당시 세간에서도 무수한 의혹을 자아냈다.

사실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불편한 존재였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639년 7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신하로부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조선의 왕을 바꾸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더라"는 한 청나라 장군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를 보고 받았다. 실제로 청나라는 인조에 대한 불신이 높은 상태였다. 여전히 반청감정이 높은 사대부 세력과 청나라의 압박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했던 인조로서는 머리털이 쭈볏서는듯한 기분을 느낄만한 이야기였다.

또한 7개월 뒤에는 소현세자가 청나라 대신인 용골대(타다라 용골다이)로부터 '대홍망룡의(용이 수놓아진 관복)'를 선물받았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용은 오직 왕에게만 허용한 상징이었다. 인조로서는 '청나라가 나를 밀어내고 소현세자를 왕위에 앉히려고 한다'는 불안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정황이었다. 이제 소현세자는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에 가까웠다.

인조의 불안감은 아들 소현세자에 대한 경계심으로 변했다. 아들들이 처음 청나라에 끌려갔을때는 진심으로 마음아파했던 인조였지만, 세상의 변화와 신문물을 접한 소현세자가 점차 청나라와 가까워지면서 의심은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차라리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때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이제 세자의 영구 귀국은 인조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기재된 한 야사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청 황제로부터 선물받은 벼루를 자랑하자 인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벼루를 세자의 머리에 던저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당시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가 독살했는지는 정확한 물증은 남아있지않지만, 아들이 의문사를 당한 직후에도 아버지 인조가 진실을 면밀히 조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사건을 덮는데만 급급했던 행적은 명백한 사실이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에 아버지가 관여했다는 끔찍한 소문은, 자연히 봉림대군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줬을 것이다. 소현세자처럼 청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신문물을 접했던 봉림대군으로서도 잘못하면 형처럼 죽을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봉림대군이 귀국하고 약 두달 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당시 10살)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이는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조선 왕실의의 전통적인 법도를 뒤흔드는 결정이기도 했다.

봉림대군은 강하게 거부했고 신하들도 반대했지만 인조는 과거 177년전의 세조(조선 7대국왕)이 예종에게 왕위를 계승한 전례까지 들먹이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1645년 9월 27일, 봉림대군은 결국 세자의 자리에 오른다.

봉림대군으로서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자신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형 소현세자의 '대체재'가 되었듯이, 봉림대군 역시 유사시 자신의 또다른 대체재가 될 수 있는 동생 인평대군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림대군은 세자에 책봉된 뒤에도 아버지 인조의 심기를 거스를까 눈치를 보며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봉림대군이 감기에 걸려 고생하자 인조가 어의를 보냈는데 그게 하필 이형익이었다고 한다. 봉림대군은 인조의 어명까지 어겨가며 한사코 이형익에게 침을 맞는 것을 거부했다. 봉림대군으로서는 인조가 이형익을 보냈다는 것이 언제든 자신을 형처럼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1646년 3월, 인조는 이번엔 소현세자의 아내이자 며느리 강빈에게 사약을 내려 처형한다. 강빈이 시아버지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명백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들은 제주도에서 유배를 보내 그곳에서 죽게 했다. 봉림대군의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소현세자의 후손들을 미리 제거하기 위한 인조의 숙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은, 봉림대군에게는 인조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1649년 6월 17일, 인조가 재위 27년만에 5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지 4년만이었다. 효종이 왕위를 이어 조선 17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효종에게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다독하고 국가 질서를 회복해야하는 막중한 사명이 주어졌다.

하지만 효종은 즉위 한달만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신하들이 권신 김자점의 탄핵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김자점은 인조의 최측근이자 효종에게도 왕위 등극을 지지했던 공신이었다. 수많은 관료와 신하들은 김자점을 통해 사실상 인조의 정치적 실정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런데 효종으로서는 김자점의 죄를 추궁하다보면 자연히 소현세자 가족문제까지 거론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효종 본인의 왕위 계승 정통성 문제로까지 이어질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한편으로 당시 김자점의 탄핵을 강력하게 주장한 산림(山林) 세력은, 효종에게는 꼭 끌어안아야 할 정치적 파트너이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청나라에 굴복한 인조에 실망한 많은 사대부 세력이 조정을 떠나 은둔한 상태였고, 이들은 효종이 즉위하면서 새 국왕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효종으로서는 김자점과 산림세력 중 하나를 택일해야만 했다.

효종은 결국 산림세력을 선택하고 김자점을 파직했다. 하지만 산림세력의 또다른 요구였던 세자빈 강씨 사건의 재조사는 끝내 거부했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심지어 효종은 '선왕(인조)이 일찍이 소현이 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결코 기업을 부탁할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충격적인 발언까지 서슴치않았다. 한마디로 형인 소현세자와 조카까지 모두 무능하여 왕위를 이어받은 인물이 못된다고 대놓고 폄하한 것이다.

특히 효종은 형수인 강빈의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콤플렉스에 가까울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여다. 강빈의 구명을 요청했던 신하에게는 불같이 화를 내며 때려죽이기까지 했으며 언급 자체를 역린으로 규정하여 금기시했다. 자신의 왕권과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때 동고동락한 형과 형수, 조카들마저 저버릴 수 있는 정치의 비정함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효종은 보수적이고 반청감정이 강한 산림 세력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북벌론(北伐論)'을 꺼내든다.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겠다는 정책이다. 하지만 당시 융성하던 청나라와 조선의 국력차를 감안할 때 현실성은 거의 없는 이야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생활을 하며 시대의 현실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목격했던 효종 역시 그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 오늘날 학계에서는 효종의 북벌론이란 청에 굴복한 아버지 인조와도, 개방적이던 형 소현세자와도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구호였다고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사실 북벌론은 보수적인 산림의 여론을 사로잡는데도, 왕권강화를 위한 군사력 육성에 있어서도 효과적인 명분이 되었다. 물론 청나라에 직접 복수하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치욕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도 분명했다.

효종이 실제로 10년의 재위 기간 중점을 둔 것은 북벌같은 무리한 전쟁준비가 아니라 국방력 강화와 민생안정을 위한 대동법 부활 등 철저히 현실적인 정책들 위주였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효종을 왕권을 회복하고 전란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현실적인 개혁군주로 평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효종의 최후는 의미심장하다. 1659년 6월 23일 39세의 효종은, 10년전 형 소현세자처럼 침을 맞다가 사망했다. 머리에 난 종기를 치료하던 중, 어의 신가귀의 수전증으로 혈을 잘못 찌르면서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 형과 마찬가지로 석연찮은 '의료사고'의 희생양이 되어 최후를 맞이했고, 훗날까지 의문사에 대한 각종 의혹이 제기된 것도 묘한 데자뷰다.

효종은 병자호란 이후 무너져가던 조선을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했던 중흥군주의 이면에,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형과 조카들의 비극을 끝내 외면했던 비정한 면모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같이 청나라에서 시대의 변화를 함께 목격했던 형 소현세자가 자신의 경험과 포부를 펼쳐보일 기회도 없이 안타깝게 요절했다면, 효종은 인조와 산림으로 대표되는 기존 조선 지배층와의 타협을 통하여 질서의 복원을 추구했던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효종의 치세는 나름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낡고 시대에 뒤처진 조선 사회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분명했다. 오늘날까지 '만일 소현세자가 살아서 왕위를 이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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