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만나면 똥 밟는 거예요" 그녀에게 '왕자님'은 필요 없다

이진민 2023. 11. 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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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속 여환과 들레, 새로운 '구원 서사'의 등장

[이진민 기자]

K-드라마 판에서 백마 탄 왕자님들이 길을 잃었다. 부자인 데다 능력까지 출중하고, 게다가 위기에 처한 여자 주인공을 극적으로 구하던 '왕자님표' 캐릭터들이 사라졌다. 드디어 한국 드라마계에서 '왕자' 말고 새로운 남성성이 출연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돈도 많고 능력도 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동등하게 여성 캐릭터와 손을 맞잡고 위기 상황을 헤쳐간다. 덕분에 여성 캐릭터도 순진한 공주님이 아니라 당당한 사람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여기, 모든 걸 다 갖춘 남자와 스스로를 '똥'이라 칭하는 여자가 만났다. 왕자님의 도움은 기대하지 마시길. 이 커플의 모토는 '구원은 셀프'다.

지겨운 구원 서사에도 아침이 와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스틸컷
ⓒ NETFLIX
 
지난 11월 3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건강의학과 근무를 처음 하게 된 간호사 다은(박보영 분)의 성장기와 마음 시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타인에게만 친절하던 주인공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게 핵심적인 서사지만, 그 속에서도 사랑은 숨길 수 없다. 바로 서브 커플인 황여환(장률 분)과 민들레(이이담 분)다.

여환은 모든 걸 다 갖춘 전형적인 '왕자님' 캐릭터다.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 또한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부족함 없이 자랐다. 반대로 들레는 버리고 싶은 것만 가득한 삶을 살았다. 돈 빌려달라고 떼쓰는 동생과 도박 중독자인 엄마 사이에서 들레는 아름답지만, 한없이 휘청거리는 꽃이다. 그런 들레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여환의 존재는 버겁기만 할 뿐.

"계급 차이는 못 이겨요", "여환쌤 저 만나면 똥 밟는 거예요"라며 여환을 밀어내다가 마침내 사귀게 되었지만, 행복한 나날은 끝. 여환마저 새로운 물주 취급하는 엄마에 들레는 여환에게 헤어짐을 고한다. 언뜻 보면 능력 있는 남성과, 가난하고 폭력에 처한 여성의 전형적인 조합 같은 여환과 들레. 그러나 둘은 한국 드라마의 문법을 깨고 새로운 형태의 커플을 택했다.

여환은 들레를 가난에서도, 폭력에서도 구하지 않는다. 단지 들레에게 '당신은 빛나고 소중한 사람'이라며 마음을 건넨다. 들레도 여환이 마치 왕자님처럼 자신을 구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들레는 스스로 엄마와의 연을 끊고 간호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에서 벗어나 끝내 자신을 찾으러 떠난다. 이 과정에서 여환의 위치는 서포터, 들레를 응원하고 함께하는 조력자에 가깝다.

더 많은 걸 가진 남성이 부족한 여성을 구원하는 K-드라마의 전형성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는 없다. 또한 남자가 여성의 삶을 구제함으로써 대신 주도권을 쟁취하는 서사도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과 그를 응원하는 남성 간의 건강한 관계만 있다. 신데렐라 동화처럼 못된 엄마와 동생에게 시달리던 들레. 그에게 필요한 건 백마 탄 여환이 아닌 자신의 삶을 되찾을 용기와 여환의 든든한 응원이었다.

처음부터 공주에게 왕자는 필요 없었다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건 최근 화제작 jtbc <힘쎈여자 강남순>, tvN <무인도의 디바>
ⓒ jtbc / tvN
 
백마 탄 왕자님보다 조력자 같은 남성 캐릭터가 사랑받는 것 또한 새로운 움직임이다. 2022년에 방영된 tvN <작은 아씨들>은 여성 캐릭터를 서포트하는 남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인기를 끌었다. 극 중 남성 캐릭터들은 당당하면서, 동시에 결함이 있는 여성 캐릭터가 자신의 목표를 향할 때 철저히 옆에서 돕는 '조력자'에 위치했다. 이에 <작은 아씨들>은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다양하게 선보이며 새로운 여성 서사의 길을 열었다.

최근 방영 중인 <힘쎈여자 강남순>, <무인도의 디바> 모두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들이 겪는 우여곡절에 집중했다. 회차가 거듭할수록 여성 캐릭터들은 여러 난관에 부딪히지만, 헤쳐 나가는 건 오직 그들의 몫. 예전처럼 남성 캐릭터가 나타나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위기에서 구해내는 '왕자님 서사'는 없다.

한국 드라마에서 변화한 건 왕자님에서 조력자로 돌아온 남성 캐릭터만이 아니다. 남성 캐릭터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이 커졌다. 대중 또한 여성 캐릭터가 스스로 고난과 갈등을 극복하는 서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백마 탄 왕자님'의 종말이 시작된 요즘. 비단 드라마뿐만 아니라 K-POP, 웹툰, 웹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가 나타나고 있다. K-POP에선 '나르시시즘(자기애)'를 콘셉트로 한 아이브가 노래하고, 웹소설에선 과거로 회귀한 여성 캐릭터가 삶을 개척하는 서사가 나타났다. 왕자님이 사라지자 자유로워진 여성들. 어쩌면 처음부터 공주에게, 아니 여성에게 왕자는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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