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에 돌아온 '조선 역사'…110년 아픔 딛고 연 실록박물관
중종실록 1권 중 조세 경감에 대한 조정의 논의 부분(중종 1년 9월 28일 갑진 7번째 기사). 전시실에 펼쳐진 페이지에서 亦(역)이라는 글자에 빨간 줄을 긋고 知(지)라고 고친 게 눈에 띈다. 금속활자로 찍던 중 오탈자를 수정한 흔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편찬 과정에서 세 번 교정을 거쳤는데, 최종 교정쇄본은 강원도 평창에 설치한 오대산사고에 보관됐다. 주로 활자인쇄본으로 전해지는 실록 가운데 옛 사관(史官)들의 손글씨와 흔적, 교정 과정까지 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태백산사고본(국가기록원 소장)이나 정족산사고본(서울대 규장각 소장)과 다른 오대산사고본의 특징이다. 무엇보다 일제에 의해 반출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돌아온 환수문화재로서 상징성이 크다.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를 보관·전시하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하 실록박물관)이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열었다. 오는 12일 정식 개관을 앞두고 9일 둘러본 실록박물관은 총 면적 3537㎡, 지상 2층 규모로 현재는 상설전시실만 완비됐다. 내년까지 수장고 등 설비를 보완해 실록(75책)과 의궤(82책) 등 관련 유물 1207여 점을 보존·전시하게 된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박수희 학예연구관은 “실록 원본을 상시로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실록과 의궤에 관한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실을 구성했다. ‘실록각(實錄閣)’ ‘선원보각(璿源譜閣)’ 등 관련 현판부터 당시 사용된 금속활자, 보관한 궤(함), 의궤 장황 전체를 볼 수 있다. 왕실이 실록을 보관할 외사고를 설치한 역사 및 변천, 사초(史草)부터 실록 편찬까지 과정 등을 각종 영상과 시각물을 곁들여 소개했다. 문화재청은 “많은 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국내로 돌아오게 된 뜻깊은 환수 문화유산인데다 강원도민들의 의지가 강해 오대산에 국립박물관으로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오대산사고는 임진왜란 직후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할 필요성 때문에 깊은 산속에 세워진 외사고 중 하나다. 1606년 설치될 당시부터 인근의 월정사가 관리에 기여했다. 한일강제병합 직후 사고는 철폐됐고, 소장품은 조선총독부가 인수했다. 이후 실록 전량과 의궤 일부가 1913년 연구 목적으로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상당수 소실됐다.
당시 외부로 대출됐던 일부만 살아남아 27책이 1932년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소장되면서 국내에 전해졌다. 그러다 일본에 남은 책들의 존재가 알려져 각계의 노력 끝에 2006년 11월 47책이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됐다. 2011년엔 의궤 82책도 반환됐다. 2017년 일본에서 실록 1책(효종실록)이 추가로 매입·환수됐고 이들 전체가 실록박물관에 속하게 됐다.
이번 개관까지 곡절도 많았다.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국유 환수문화재인 오대산사고본을 두고 강원도와 불교계가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의 자리로 돌아감)’를 강하게 요구했다. 수년간 격론 끝에 소송도 제기하고 국회의 관련 결의안까지 끌어냈다. 결국 월정사 측이 성보박물관 내 부지와 건물을 기부채납하고 정부가 국고를 들여 이를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이날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문화분권의 시대라는 관점에 많은 분들이 동의한 덕에 110년 만에 귀향한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실록과 의궤를 상설 전시함으로써 폭넓은 연구와 향유의 중심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입장료는 무료, 매주 화요일에 휴관한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4시 50분까지이며, 5~10월에는 오후 5시 30분까지 연장 운영한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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