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력 220년 합을 맞췄다…신구·박근형·박정자의 이 연극
"처음엔 주저했어요. 그런데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전부 토해낸다면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과욕을 부렸어요.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 볼게요."
배우 신구(87)는 9일 서울 예술가의 집 다목적홀에서 열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출연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이 연극은 몇 달 전부터 호화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다. 주·조연을 맡은 신구, 박근형(83), 박정자(81), 김학철(64) 등 배우들의 연기경력을 합치면 220년이 넘는다. 최고령인 신구를 비롯한 모든 배우가 캐스팅 변경 없이 두 달간 모든 회차에 출연한다는 사실도 놀랍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으로 1953년 파리에서 초연했다. 두 방랑자,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가 실체가 없는 인물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1969년 임영웅 연출이 첫선을 보인 뒤 50년간 극단 산울림에서만 1500회가량 무대에 올렸다.
새 프로덕션을 이끄는 오경택 연출은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며 "연출로서 이런 부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보다 대본에 충실하고 선생님들을 믿고 간다는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배우로서 그동안 쌓아오신 시간의 힘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새 프로덕션에서는 신구가 고고, 박근형이 디디를 맡았다. 김학철은 지주 포조, 박정자는 포조의 짐꾼 럭키 역이다. 숱하게 무대에 오른 이들이지만 '고도를 기다리며'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년 역은 신인 배우 김리안(26)이 맡는다.
신구와 박근형이 연극 무대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점도 포인트. 박근형은 "신구 선생님과 드라마나 연극을 같이 한 적이 없다"며 "예능 '꽃보다 할배'를 함께 했는데 그때 참 진솔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신구와의 '합'에 대해서는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다"며 "연출의 제시에 따라 디테일한 부분을 맞춰가며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신구는 "고고는 내일은 고도가 올 거라고 믿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캐릭터"며 "고도가 상징하는 것이 신이든, 자유든, 희망이든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박근형은 "디디라는 인물은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함을 전한다"며 "디디 역은 제가 추구하는 연기와 달리 자유분방하게 표현해야 한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임하겠다"고 했다.
박정자는 국내 여성 배우로는 처음으로 럭키를 연기한다. 박씨는 "작품 소식을 듣자마자 럭키 역을 맡겠다고 손을 들었다"며 "배우는 남녀에 구별이 없다. 신구·박근형 선생님이 럭키를 못 하겠나, 여성 역할을 못 하겠나. 우리는 자유롭다"고 했다.
오 연출은 "이 연극은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며 박정자의 말에 호응했다.
김학철은 첫 연습 당시 박정자를 마주한 순간을 소개해 좌중의 웃음을 끌어내기도 했다. "첫 연습에서 박정자 선생님 목에 밧줄을 걸어야 했는데 송구한 마음에 90도 인사를 올렸다"며 "처음은 송구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선생님이 제 노예 같다. 거침없이 표현하겠다"면서다.
공연은 다음 달 19일부터 내년 2월 18일까지 국립극장에서 열린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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