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주선거 '낙태권 위력'…민주당 "트럼프=낙태반대" 대공세
“어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좋은 밤이었습니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예고 없이 기자들과 만나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전날 실시된 버지니아 주의회 선거 등 일부 주 단위 선거에서 민주당이 예상외로 선전하며 공화당 후보들을 꺾자 고무된 표정이었다. 최근 공개된 전국 단위 여론조사, 경합주 조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잇따라 밀린 것으로 나타나자 위기감에 사로잡혔던 백악관과 민주당에 전해진 ‘낭보’였다.
바이든 선거 캠프는 특히 미 대선을 1년 앞두고 민심의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이번 선거에서 ‘낙태 선택권’의 정치적 위력이 재확인된 것에 주목하며 낙태 이슈를 핵심 쟁점으로 가져가겠다는 복안이다.
‘낙태 옹호’ 민주 약진, ‘낙태 반대’ 공화 고전
전날 실시된 선거 결과는 낙태 선택권을 옹호한 민주당 후보의 약진과 이를 반대한 공화당 후보의 고전으로 요약된다. 낙태권이 주요 쟁점이 됐던 버지니아 주의회 선거, 오하이오 주민투표, 켄터키 주지사 선거 등 3곳에서 모두 민주당이 공화당을 눌렀다. 버지니아주 주의회 상ㆍ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양원 모두 다수당에 올랐다. 선거 전에는 상원에서만 다수당이었다.
공화당 내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르던 글렌 영킨 버지니아 주지사는 이번 선거에서 주의회 양원을 공화당이 장악한 뒤 임신 15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 개정에 나서겠다고 공언했지만, 민주당에 패하면서 힘을 잃었다.
2016년, 2020년 대선에서 연이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밀었던 오하이오 주에서는 낙태권 보장을 위한 법 개정 주민투표가 과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에 따라 오하이오 주는 지난해 6월 연방 대법원이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하고 낙태권 존폐 결정 권한을 각 주로 넘긴 이후 낙태권 보장을 선택한 7번째 주가 됐다.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한 켄터키주에서도 낙태 선택권을 지지하는 민주당 소속 앤디 베시어 주지사가 낙태 반대를 주장해 온 공화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또 펜실베이니아 대법관 선거에서도 ‘낙태권 수호자’를 자처해 온 댄 맥커패리가 당선됐다.
반면 미시시피 주지사 선거에서는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당 입장과는 달리 ‘낙태 반대론’을 펴 온 브랜든 프레슬리 후보가 공화당 소속 테이트 리브스 현 주지사에 패배하면서 대조를 이뤘다. 공화당이 이기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이 사라진 사회가 될 것이라며 경고했던 민주당의 선거 전략이 여성과 젊은 층 공략에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낙태 이슈, 정파 아닌 다양한 집단에 호소”
선거전에서 낙태 선택권의 '화력'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도 입증됐다. 당초 ‘레드 웨이브’(공화당 압승)가 될 거라는 예상을 깨고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 지위를 유지한 데엔 낙태 이슈를 통한 지지층 결집이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낙태 이슈를 두고 공화당은 ‘생명 우선’(Pro-life) 정당으로, 민주당은 개인의 선택권을 우선하는 ‘선택 우선’(Pro-choice)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소영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지난 2월 발표한 논문 ‘미국의 낙태 이슈와 2022년 중간선거’에서 “경합주에서의 민주당 선전에 낙태 이슈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낙태 이슈는 정파적으로만 나뉘어 있는 이슈가 아니라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다양한 집단에 호소할 수 있는 이슈라는 점에서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미 워싱턴포스트(WP)는 “민주당이 2022년 중간선거처럼 다시 한번 예상을 뛰어넘었다”며 “특히 2022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은 연방 대법원 판결이 민주당에는 엄청난 정치적 선물이 됐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짚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적어도 일시적으로 바이든 대통령의 약점을 보여주는 최근 일련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비롯된 민주당의 조바심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CNN이 여론조사업체 SSRS에 의뢰해 지난달 27일부터 지난 2일까지 미 성인 15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8일 공개한 여론조사(오차범위 ±3.3%포인트) 결과 바이든 대통령(45%)은 트럼프 전 대통령(49%)에 오차범위 내긴 하지만 4%포인트로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대선 때 바이든 대통령에게 몰표를 안긴 흑인 등 유색인종과 젊은 층의 지지세 하락도 뚜렷한 것으로 조사됐다.
백악관 “여론조사가 아닌 투표가 중요”
그러나 7일 선거 결과를 받아든 바이든 캠프 측은 “여론조사는 여론조사일 뿐”이라며 분위기 반전을 꾀하는 모습이다. 카린 잔피에어 백악관 대변인은 8일 브리핑에서 “어젯밤 유권자들은 중요한 메시지를 보냈다. 투표는 중요하나 여론조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라며 “유권자들은 근본적인 자유와 중산층 경제 구축, 민주주의 보호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제에 다시 한번 힘을 실어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선거 결과는 내년 대선에서도 낙태 이슈가 유권자 표심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ㆍ공화 양당의 향후 대선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든 선거 캠프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 연방 대법관들에 의해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어졌다는 점을 부각하는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트럼프=낙태 반대’ 프레임으로 집중 공격해 트럼프 전 대통령에 밀리는 듯했던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올린다는 전략이다.
“이번 선거와 대선판은 다를 수도”
다만 이번 선거와 실제 대선판은 다를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NYT는 “민주당은 이번처럼 투표율이 낮은 특별선거를 지배하는 고관여층 유권자들에게 강세를 보이지만 트럼프는 대선 레이스에만 참여하는 저관여층 유권자에게서 강점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즉 이번 선거에서 투표소에 나오지 않은 유권자 상당수는 트럼프 지지로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여, 이들이 얼마나 내년 대선 때 실제 투표를 할지가 주목할 포인트라는 얘기다.
NYT는 “7일 투표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내년 11월 대선에 투표할 가능성이 있는 약 200만 명의 오하이오 유권자들은 여론조사에서 낙태권을 지지한다고 밝혀도 낙태에 특별한 투표 동기를 가진 유권자는 아니다. 대신 경제나 바이든의 고령 같은 문제로 표심을 결정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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