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클럽 시스템 발전, 재능 발견하는 사람 많아질 것"
[김종수 기자]
▲ 전 서울고 유정민 감독 |
ⓒ 유정민 감독 제공 |
"좀 더 많은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클럽 야구의 길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고교야구계에서 덕장이자 지장으로 명성이 높은 유정민(53) 전 서울고 감독은 최근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12월 오픈 예정인 신생 클럽야구팀 'Aptive BC' 사령탑을 맡은 것이다. 의아한 시선도 많았다. 클럽야구팀이 나빠서가 아니다. 2015년 서울고 야구부 사령탑으로 부임해 9년 동안 강백호(KT), 최원준(KIA), 정우영(LG), 이재원(LG), 안재석(두산), 이병헌(두산), 이재현(삼성), 김서현(한화) 등 쟁쟁한 제자들을 배출해내며 아마야구계에서 이름을 굳혔다.
그대로만 있어도 어느 정도 안정된 길이 보장되거니와 더 좋은 쪽으로의 진출도 충분히 모색할 수 있었다. 반면 클럽야구는 아직까지 시작단계인지라 갈 길이 멀다. 안정성과는 거리가 있다.
"이것 저것 재고 계산했으면 애당초 시작도 안 했을 겁니다. 제가 야구 지도자를 하고 있는 이유는 좀 더 많은 유망주들이 사랑하는 야구를 통해서 원하는 꿈을 이뤘으면 해서 입니다. 서울고 감독으로 있으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지만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기회를 덜 받는 제자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도 컸습니다. 거기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다가 다른 방향으로의 도전을 마음먹게 됐죠."
유 감독이 맡게 될 팀 이름인 'Aptive'는 신조어로서 직역하면 '적성에 맞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Providing, contributing to'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변화한다는 여러가지 뜻을 포함한 단어다. 유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과도 맞다. 팀 구성원 개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서울고 시절부터 유 감독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두발 자유화(국내 최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크게 터치를 안 했고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서도 각 개인의 특성을 최대한 존중했다. 자신의 잣대로 선수를 강제로 뜯어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다소 이상해 보이더라도 그게 본인에게 잘 맞는다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밀어준다. '어차피 야구는 선수들이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잘 실천해나간 세월이었다.
때문에 유 감독은 과학적인 기기 활용을 이용한 측정과 데이터 제공 등도 적극 활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드라이브라인, 블라스트 모션분석 기기(랩소도) 등 최신 기기도입으로 선수 개개인의 운동능력을 측정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미국 명문 스포츠아카데미 'IMG Academy'의 체계적인 교육 훈련 방법을 국내 현실에 맞게 도입하는 동시에 1년 1회 미국 현지 전지훈련을 통한 시설 및 시스템을 이용함으로써 국제 경쟁력을 키울 계획이다.
그 외, 모바일 앱을 통한 자기주도적인 훈련, 체력단련과 기술레슨 등의 통합 시스템 등 다양한 아이템을 구상 중이다. 안정적인 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야구계의 변화에 뛰어든 유 감독을 만나 그의 야구철학과 향후 계획을 들어보았다.
▲ 유정민 감독과 이정후 선수 |
ⓒ 유정민 감독 제공 |
- 안정된 서울고 사령탑을 그만두시고 신생 클럽 팀 'Aptive BC(U-18)' 사령탑으로 나서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그냥 서울고에 있으면 편할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뜻이겠죠. 개인적으로 클럽팀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제가 뭘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싶지만 조금이라도 일조를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야구로 성공하려면 무조건 엘리트 쪽으로 가야하거든요. 클럽하면 갈 곳 없어서 가는? 그런 이미지가 좀 있죠. 진심으로 열정만 있다면 어디서 야구를 해도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많이 못 받은 친구들이 클럽팀에서 다시 기회를 잡고 재도약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 농구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클럽팀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의외로 최고 인기 스포츠 야구가 가장 늦고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요.
"말씀하신 부분에 답의 일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기가 너무 좋으니까 그래요. 솔직히 국내에서의 인기나 팬층은 독보적이잖아요. 그만큼 선수가 되겠다고 덤비는 숫자도 많고요. 야구부가 있는 학교도 타 종목 대비 적지 않죠. 일단 선수 쪽을 희망한다면 엘리트 쪽으로 가는 게 기본 코스이기도 하고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부분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클럽 쪽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면 더 많은 이들이 기회를 받을 수 있고 그만큼 인프라가 늘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장 엘리트 쪽으로 가기 망설여지는 친구들이 큰 부담없이 즐기면서 적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도 있고요."
"맞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내가 해당 종목에 적성이 맞는지 아님 또래들 중에서 실력이 빼어난지는 조금 시간이 지나봐야 알아요. 사람마다 재능이 발휘되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니까요. 하지만 엘리트 스포츠같은 경우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해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올인하는 시스템인지라 거기서 멈추기도 힘들거니와 만약 낙오라도 하게 되면 정말 힘들어지거든요. 이른바 뒤가 없는 거죠. 공부라도 병행했으면 일반 학생들처럼 다른 길이라도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이게 아닌데…'라고 느낄 경우에는 늦은 경우가 많거든요. 클럽활동 같은 경우 그런 시간을 벌어준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있을 듯싶어요. 어차피 야구도 재능의 스포츠인지라 될 선수들은 클럽으로 시작해도 충분히 두각을 드러냅니다."
▲ 유정민 감독과 서울고 시절 제자 최원준 |
ⓒ 유정민 감독 제공 |
- 야구는 특히 팀별로 인원이 엄청 많잖아요. 기회를 못 받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 선수들도 많을 듯싶어요.
"그렇죠. 당장 제가 있던 서울고만 하더라도 야구부원들이 60~70명 정도 있었어요. 게임에 나갈 인원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교체 멤버같은 경우 주전으로 나서기는 아쉬워도 나머지 선수 중에서는 그래도 눈에 띄게 잘하는 선수들이고요. 정말 못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어설프게 잘하는 케이스같은 경우 중간에 묻혀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중에는 조금만 기회를 더 줘도 확 치고 나갈 수 있는 유형도 있고, 대기만성형도 있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그 많은 숫자가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기회를 받기는 쉽지 않아요. 당장 눈으로 봤을 때 제일 잘하는 선수들 위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해도 실전을 통해 담금질이 되지 않으면 한계가 있어요."
- 경기에 잘 나서지 못하는 선수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셨나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기회는 받아봐야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수의 인원 속에서 그렇게 세심하게 챙기기는 쉽지 않죠. 숫자에 맞춰 로테이션을 돌리면 되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건 또 다른 차별의 여지가 있습니다. 기존에 잘했던 성적과 결과로 보여준 선수들이 있는데 거기서 기계적으로 균등 분배한다는 게 쉽지 않죠. 그래서 서울고 시절 팀을 나눠서 각각의 다른 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구상해봤는데 그것은 규정상 어렵더라고요. 결국 재능이 있어도 경기를 잘 뛰지 못하는 선수가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반면 클럽 시스템은 다릅니다. 어느 정도 개개인의 출장시간을 맞춰주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해요.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표가 만들어지는 거죠. 저같은 경우 중고등학교를 1, 2, 3학년을 나눠서 운영을 해볼까 계획 중입니다."
▲ 유정민 감독은 더 많은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기위해서 클럽 야구를 택했다. |
ⓒ 유정민 감독 제공 |
- 확실히 야구 쪽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가 많은 것 같기는 해요.
"공감합니다. 하는 선수가 많아서인지 아님 종목의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케이스가 유독 많기는 합니다. 타 종목같은 경우 프로 신인드래프트 하위순번에서 주전급 플레이어가 나오는 케이스는 정말 드물어요. 연습생 등 기타사례는 말할 것도 없고요. 반면 야구는 좀 다릅니다. 상위순번보다 더 성공한 하위순번이 무수히 많아요. '프로에서의 성공은 순번순이 아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연습생 출신만 해도 장종훈, 한용덕, 김상진, 박경완, 김현수, 서건창, 이천웅 등이 당장 떠오릅니다. 이만큼 야구는 숨겨진 재능이 많은 스포츠라는 것이지요.
제가 클럽 농구를 통해 최대한 많은 선수에게 기회를 줘보려는 이유죠. 진짜로 야구에 애정이 깊다면 갈 수 있는 길은 많아요. 꼭 당장 프로에 가지 못하더라도 대학을 간 이후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고 해외리그도 있어요. 공부를 더하고 싶다면 유학같은 것도 연결시켜줄 수 있고요. 하지만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최소한의 기록은 필요해요. 그걸 아이들에게 챙겨주고 싶은데 기존 제도권 아래에서보다는 클럽 쪽이 더 자유로울 수 있겠다 싶어서 새로운 길을 택하게 됐습니다."
- 그렇겠네요. 재능이 아주 뛰어난 선수같으면 어디서든 잘하겠지만 어중간하게 중하위권에서 멤도는 선수는 클럽팀 등에서 뛰며 경험치를 많이 쌓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제가 추구하는 모토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부분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이들의 성향은 다 달라서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케이스가 있고 천천히 재능이 발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다소 아쉽다고 느꼈는데 기회를 받으면서 서서히 달라지는 케이스도 적지 않거든요. 그런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클럽 야구 같은 경우 아직 막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전국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앞으로 적지 않은 숫자의 팀이 생겨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경험을 쌓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될 테니까요. 일단 클럽에서 뛰어도 학생들이 나갈 수 있는 모든 대회는 다 출전이 가능합니다. 동등한 자격으로 유명 학교팀들과 전국대회에서 붙을 수 있는거죠. 일본같은 경우 클럽 야구가 굉장히 활성화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전국대회 같은 것 보면 토너먼트 등에서 클럽야구팀이 유명한 고교강호를 잡아내는 경우도 종종 생겨나고요. 그런 경우가 쌓이다보면 클럽 야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인프라가 넓어지는거죠."
- '경험이 꿈을 만든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라요.
"좋은 얘기네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어쨌든 야구가 좋아서 시작한 아이들이니만큼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입니다. 야구는 하면 할수록 어려운 운동이에요. 예를 들면 초등학교 야구부 아이들은 처음에는 '난 메이저리거가 될 거야'라는 원대한 꿈을 품기도 해요. 그러다가 중학교 때는 '프로선수가 돼야지'로 꿈이 낮아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선수는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경우가 태반이죠. 프로선수가 된다고 해도 성공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안에서 엄청난 경쟁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오히려 학생 때보다 더할 수도 있어요. 저는 아이들이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다양한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선수의 길도 있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트레이너, 매니저, 스카우터, 에이전트 등 다양한 쪽도 있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야구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보통 선수로의 길이 좌절되거나 잘 풀리지 않은 경우 야구를 싫어하게 되는 케이스도 적지 않아요.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애정이 남아있을지 몰라도 당장은 야구를 쳐다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보면 아쉽고 화가 나니까 그렇겠죠. 실컷 해보지 못한 아쉬움도 이유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아이들이 최대한 많이 뛰어보고 느끼고 그러면서 야구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어차피 야구는 선수들이 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더 성장하고 어떤 길로 갈 것인지는 본인들의 몫이죠. 저는 최대한 경험을 쌓고 이후 꿈을 꿀 수 있는 판만 깔아주고 싶은 것입니다."
- 서울고 시절에도 최대한 선수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지도자로 유명했어요.
"자유롭다라… 기준점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구에 별반 영향이 없는 부분까지 터치하지는 않으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두발 같은 것요. 운동부 두발 자유화는 제가 한국 지도자들 중에서 최초로 알고 있어요. 보통 운동부 친구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나서거든요. 투지를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자의가 아닌 타의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투지라는 것은 내가 불태우는 것이지 남이 옆에서 점화를 해주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깎고 싶으면 깎는 거고, 머리가 길 때 컨디션이 좋다면 그렇게 하라는 거죠.
이번에 일본 고시엔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고교가 화제가 됐잖아요. 거기는 야구 특기생이 없어요.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성적이 안 되면 입학이 불가능하거든요. 운동부 분위기도 강압보다도 자율에 의해 움직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제패했어요. 공부를 병행하려면 정말 어렵겠죠. 하지만 선수들이 야구를 너무 좋아했기에 누가 옆에서 등 떠밀지 않아도 알아서 한단 말이에요. 우리 한국야구가 가야 할 방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 마지막으로 지도자 유정민에게 야구란 무엇일까요?
"하하핫… 지금까지 질문 중 가장 어려운데요. 글쎄요. 다른 멋진 표현도 많지만 저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할께요. 아이들에게도 좋아서 야구를 하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실상은 제가 야구를 좋아하니까 그렇지 않나 싶어요. 지난 야구 인생을 돌아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야구를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은 얼굴에서 행복이 느껴져요. 꼭 결과가 좋을 수만은 없어요. 열심히 했는데도 안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좋아서 최선을 다했으면 그만큼 후회도 적겠죠. 아이들에게도 그런 야구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아니 함께 나누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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