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벼슬까지 모두 사양한 선비 윤증

김삼웅 2023. 11. 9.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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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16] 윤증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선생은 17세기 조선조의 격동기를 살다간 성리학자, 예학자로서 한국유학사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유한 분이다. 선생은 보기 드문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덕행을 실천하는 데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인 지행겸병의 참 지식인이었다.

선생은 항상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을 강조하였다. 헛된 담론을 일삼거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잘못된 공부 방법을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참된 도리를 제대로 깨우쳐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나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군자와 소인이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참으로 사람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고민했던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남명진, <무실과 실심의 유학자 명재 윤증>, 서문)

윤증은 인조 7년 서울 정선방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대의 큰 정치세력인 송시열·송준길·유계·이유태 등과 함께 '산림5현'에 드는 윤선거(尹宣擧)이고, 어머니는 공주 이씨다. 그의 조부는 대사간을 지낸 윤황으로 기호학파의 거두 우계 성혼의 사위다.

그가 아홉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다. 강화도가 청국군에 함락되는 위기를 맞자 어머니는 정절을 지키고자 순절하였다. 아버지는 적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 있었다.

윤증은 한 살 위인 누이와 함께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의 순절과 아버지의 지절은 어린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학(家學)을 통해 기초 학문을 닦던 그는 14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금산에 살면서 아버지의 벗 유계(兪棨)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다. 출세하는 과거시험 공부보다 학문을 위한 공부였다.

이후 여러 저명한 유학자들로부터 배웠다. 30살 때 학덕이 높아지자 사림(士林)에서 조정에 천거했으나 나이가 어린데 너무 출세가 빠르다고 아버지의 만류로 나아가지 않았다. 장성할수록 그의 깊은 학문은 조야에 널리 알려지고 조정에서는 각급 관직을 제수하여 수 차례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는 학천(學薦)으로 31세에 위사강원(徫司講院)에 뽑혔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에 공조좌랑38세, 세자익위(世子翊衛) 39세, 전라도사 40세, 사헌부 봉평41세, 사헌부 장금 44세, 집의(執義) 45세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 후에도 각급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거절했다.

53세 성균관 사업 사양
54세 경연관 사양
55세 장락원정·호조참의 사양
56세 이조참의·한성부윤 사양
57세 대사헌 사양
67세 이조참판 사양
68세 공조판서, 우참찬 사양
69세 제주(祭酒) 사양
70세 이조판서 사양
73세 좌참찬 사양
74세 세자이사(世子貳師) 사양
82세 우의정 사양
83세 판중추부사 사양.(유명종, <명재 윤증의 무실 실학>, <무실과 실심의 유학자 명재 윤증>)

우리 유학사에서 윤증과 같이 많은 감투가 제수되었지만 끝까지 사양한 이는 찾기 어렵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자·언론인·법조인 중에 정권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감투, 특히 '기름진 자리'를 탐하는 세태에서, 그는 참으로 희귀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명재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 언행과 성의를 살펴보고 허락하되, 지체 높은 집안이나 부잣집 자제들은 모두 고사하여 권세와 이익을 추구한다는 혐의를 멀리하였다. 그리고 "한 묶음의 포(脯)를 들고 찾아와서 배우고자 청하는 사람을 내가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논어>, <술이>)고 한 공자의 교육정신을 이어받아 가난한 시골 선비의 자제를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리하여 80여 명의 문인을 길러냈으나, 명제의 문하에는 호화로운 서울 출신 제자가 드물었다고 한다.(신동호, <명재 윤증의 인품과 일화>, 앞의 책)

윤증의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가 이러했다. 일생 동안 청렴 고결한 선비의 길을 걸었다.

명재와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숙종대왕이 그에게 몇 번씩 정승의 벼슬을 내려주고, 그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시를 지어 조상하기를 "유림이 그 도덕을 존중하니, 소자 또한 일찍이 흠모하였다. 평생 얼굴 한 번 보지 못하였기에 몰일에 한이 더욱 깊도다"라고 한 것을 보면 명재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신동호, 앞의 글)

명재 윤중 선생의 어록 중에서 몇 수를 골랐다.

선비의 처신은 마땅히 활시위처럼 곧아야 한다.

선비가 학문하는 것은 농부가 받을 가는 것과 같다.

학자가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세속의 유행에 스스로 휘말려 처신이 고명하지 못한 데 있다.

일 할 때는 반드시 옳음을 구하라.

극기 하지 못하는 것은 학자의 중요한 흠결이다. 구하여 모두 읽는 것이 어떻겠는가?
입지(立志)가 가장 먼저이고, 지신(持身)이 그 다음이다.

대저 의로움(義)이란 천리(天理)이고, 이로움(利)이란 인욕(人慾)이다. 천리에 순수한 것이 왕도(王道)이고, 인욕에 섞인 것이 패술(覇術)이다.

무릇 일이란 의로움으로써 판단을 내리면 밖이 저절로 바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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