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추알, 주유소 그리고 도시
“우리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다녔다. 나는 벤츠를 탄다. 우리 아들도 아마 벤츠를 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손자들은 다시 낙타를 타야 할 수도 있다.” 이 문장이 산유국의 위기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매장량이 고갈되어서든 기후변화 환경정책 때문이든 석유 시대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이런 위기감이 중동에 신기루 도시들을 만든다. 이들도 대안 전략으로 관광 도시 조성을 꺼내 든다. 그러나 낙타 체험 여행이 미래 관광상품이 될 수 없으니 사막에 물을 뿌려 골프장 만들고 유럽 프랜차이즈 미술관 세운다. 냉방 쾌적한 쇼핑센터와 분수 뿜는 호텔 포진한 대추야자 가로수 도시다. 방향이 어찌 되었든 이들은 백 년 뒤를 가늠하고 도시를 만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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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루 같은 아랍의 도시 건설
석유시대 종말 대비 장기 계획
온갖 변수 작동하는 곳이 도시
도시가 득표 도구인 한국 정치
」
20세기를 받쳐온 에너지가 석유였으니 그 마무리 여파도 전 세계에 미칠 것이다. 산유국 아니라고 한국이 예외일 수 없다. 일단 조선산업의 수주 목록에 결국 유조선이 사라지겠고, 정유공장도 철거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도시 곳곳에 박힌 것들도 변화해야 할 터인데, 그건 주유소다.
승용차가 희귀하던 시절에는 주유소도 특별했다. 대통령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에 청와대도 아닌 주제에 무엄하게 청기와를 얹어 유명해진 주유소도 있었다. 당시 버스정류장 이름이 될 정도였으니, 청기와주유소는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주유소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자동차가 일상재가 되면서 주유소 간 거리 제한도 풀렸다. 주유소가 도시에 숱하게 뿌려지면서 소매 유가를 놓고 주유소가 서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다. 그래서 휴지와 물통이 주유 고객 사은품으로 등장했다. 주유소의 입지가 더 중요해졌는데, 그게 좀 흥미롭다. 일반적인 소매점이라면 가장 선호하는 곳은 블록의 모서리다. 백화점은 투자 규모가 크니 입지조건은 무조건 교차로 모서리다. 그래서 백화점 건물은 둥근 모서리와 그곳의 전망 엘리베이터가 일반적 모습이다. 그런데 주유소는 입장이 좀 다르다. 승용차의 주행 원칙은 직진이다. 차선변경은 접촉사고 최고 빈발 원인이다. 그래서 초보운전자에게 최고난이도 주행이 바로 차선변경이다. 그런데 교차로 주유소에 들어서려면 우회전하려는 차량들과 차선변경으로 위치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주유소 위치로는 교차로 모서리의 장점이 없다. 지도를 펴고 주유소 위치들을 짚으면 보인다.
마지막 주유소. 가끔 도로에서 만나는 최후통첩이다. 주유하고 가지 않으면 낭패를 보리라는 위협이기도 하다. 우리의 운전자들은 이 상황을 현장 전문용어로 ‘앵꼬’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지도를 펴놓고 짚어보면 도시고속도로 진입 마지막 위치에 자리 잡은 주유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청기와주유소도 김포공항 가는 길에서 당시 이름으로 제2 한강교를 건너기 직전의 마지막 주유소였다. 비행기 탑승이 특권이던 시절에 다리 너머는 허허벌판이라 청기와주유소는 위치와 형식이 걸맞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기민한 주유소가 다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분명 자동차들이기는 한데 이미 밤새 충전하고 나왔다는 차들이 무심히 주유소를 지나친다. 주유소의 미래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실제로 주유소는 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요인이 복잡하고 흥미롭다.
치킨점과 햄버거집에 키오스크라는 것이 등장했다. 최저임금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손님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한 풍경이다. 주문받던 알바생들의 최저임금을 분식점에서 버티기 어려웠는데 주유소인들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주유소 역시 손님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고 그걸 셀프주유소라 호칭한다. 그러나 주유소의 상황은 소매점과 좀 달랐다.
이전의 주유소에서는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고 ‘만땅!’이라고 외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손님이 차 문 열고 내려서 카드 넣고 버튼 누르고 주유구 열고 기다리다가 다시 주유기 걸고 영수증 챙겨야 한다. 자본주의의 민첩한 메커니즘이 차에서 내린 이 운전자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이들을 커피·빵으로 유혹하고 잊었던 물휴지·담배 사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주유소의 업종 이종교배에 따른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대추 한 알에도 태풍·천둥·번개 몇 개가 들어있다더라. 대추야자 뿌리도 모래 속에서 치열하다. 주유소 하나에도 세계사 전개, 국제정세 변화, 소비자 행태가 다 간섭한다. 당연히 편의점·커피점·분식점도 다 그렇게 민감하고 탄력적이다. 거기 모두 식구들의 생존이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여 작동하는 구조체를 도시라 부른다. 그래서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다.
그런 도시를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겠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불거지는 걸 보니 또 선거철이 된 모양이다. 도시를 투표지에 찍을 붓두껍 인장 개수로 계량하는 순간, 시민들은 갈등으로 부대낀다. 도시에 담긴 인생들을 기껏해야 대추 알처럼 빨간색, 파란색으로 나눠 세겠다는 정치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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