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보수의 품격

김현기 2023. 11. 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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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일본이 자랑하는 암 치료법인 '중입자선(重粒子線)' 치료시설은 1994년 세계 최초로 생겼다. 중입자선을 빛 속도의 70%까지 가속해 몸속 깊은 곳의 암세포를 최대 에너지로 공격한다. 그런데 이 첨단 치료시설이 정작 수도 도쿄에는 없다. 지방 도시 7곳에 분산돼 있다.
암환자 수? 물론 도쿄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도 그렇게 한다. 말로만 지방 균형발전을 외치는 게 아니라 행동을 수반한다.

「 메가시티, 은행 때리기 고민은 했나
과연 이게 보수의 변화 방식인가
중도 보수는 '칼'보다 상식을 원해


일본 지방이 잘 사는 이유...50년 걸친 일본개조론~지방창생

일본을 찾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지방의 힘이다. 이유가 있다.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일본 열도 개조론', 2010년대 아베 신조 총리의 '지방 창생'에 이르기까지 국가 균형발전 정책에는 논리와 단계, 일관성이 있었다.
사람과 물건, 정보를 수도에서 지방으로 역류토록 한 게 다나카였다면 아베는 지방마다 특징적 산업을 일으켰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왼쪽)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다나카 시절 마쓰시타전기(현 파나소닉)는 광역 지자체에 '1현(県) 1공장'을 실현했다. 아베 8년 임기 중 후쿠이현은 세계 유수의 안경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니가타현은 장인(匠人)들이 운집하는 모노즈쿠리(정교한 물건 만들기) 메카로 부상했다.
대신 도쿄는 체중을 늘리는 게 아니라 '근육질'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역사적인 것은 지키고(守),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破), 과거와 현재에서 벗어나(離) 미래를 위해 새로운 걸 창조하는 '수파리(守破離)' 도시재생에 승부를 걸었다.


은행 체질 개선, 김범수의 수염을 자르게 하는 건…

뜬금없이 튀어나온 '김포, 서울 편입' 촌극은 생각의 폭, 고민의 깊이가 모두 얕기 그지없다. 비판론이 거세어지자 여당은 부산·광주까지 '메가시티'로 만들겠다고 한다. 포퓰리즘이 원래 그렇다. 악순환이다. 더 스타일 구기기 전에 이쯤 해서 접는 게 낫다.
답답한 일은 이뿐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이 (이자로) 갑질을 많이 한다. 정부가 방치해선 절대 안 된다"고 말한 지 이틀 후, 소상공인 대회에서 어퍼컷을 날린 지 몇 시간 만에 하나은행(1000억원)을 비롯한 은행권은 거액의 금융지원 방침을 내놨다. 올 연초 대통령의 '돈잔치' 발언 이후 상황과 빼닮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소상공인대회 개막식에 참석해 격려사를 마치고 특유의 어퍼컷 세러모니를 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하지만 고금리는 이미 세계적 추세다. 일본 미쓰비시UFJ은행의 경우 10년 만기 예금금리를 무려 100배(0.002%→0.2%) 올렸다. 대출금리도 마찬가지다. 일본이라고 왜 고통받고 허덕이는 서민, 소상공인이 없겠나. 하지만 시장이 정하는 금리를 정부와 지도자가 일일이 규제하기 시작하면 순간은 환호하지만, 시장은 왜곡된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은행들이 반도체, 자동차와 비교해 어떤 혁신을 했기에 올해 60조원의 이자 이익을 거둘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최대 원인 제공자는 대출규제를 확 푼 정부 아니었던가. 정례 행사마냥 '은행 때리기'로 정치적 고비마다 자금 갹출을 요구하는 건 비정상이다. 문제가 있으면 제도를 근본적으로, 지속적으로 뜯어고치는 게 정상이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비대면 금융사고 예방 추진을 위한 협약식에서 국내 은행장 등 참석자들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개회사가 끝나자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카카오를 직접 겨냥해 "매우 부도덕하다"고 비판한 것도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닌 듯싶다. 관계 기관이 알아서 처벌·제재하면 될 일이다. 창업자 김범수의 수염을 자르게 하는 건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시스템이 해야 한다. 트럼프의 특정 기업(페이스북·트위터) 때리기가 비난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미 항간에는 "대통령 외유 파트너 대기업들만 무풍지대"란 원성이 나오는 판이다. 소수의 통쾌함보다 다수의 진중함이 우선이다.


『보수의 품격』

근대 보수주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보수의 품격』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은 '혁명'을 지지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개혁과 변화를 얼마나 주의 깊고 신중하게 시도하느냐의 차이라고 규정했다. 윤석열 정부를 지지한 많은 중도 보수 유권자 또한 같은 생각이었을 게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보수 정부는 그렇게 가고 있는가. 소수의 극보수는 '칼'을 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의, 그리고 현 정부의 진짜 명운을 쥔 중도 보수는 원칙과 상식을 갈구한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kim.hyun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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