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의 과학 산책] 중간자스러운…
얼마 전 할리우드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서 먹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졌다. 곧바로 원작 도서를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영화는 대체로 원작에 충실했으나 책과 다른 내용도 눈에 띄었다. 오펜하이머가 대학원 지도교수를 독살하려 했던 부분을 영화에서는 가벼운 에피소드처럼 다뤘다. 한편 청문회 내용 중 어찌 보면 사소한 부분은 시각적으로 선정성을 강조했다.
사실 원자폭탄이 2차 세계대전 종식에 기여한 정도는 레이더 개발이나 암호 해독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원폭이 완성되기 전에 히틀러는 이미 자살했고,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에 열광한 군부와 정치권은 개발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를 20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띄웠다. 그는 유려한 언변까지 더해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과학계와 정계를 아우르고 연결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더 강력한 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관련 정책 결정에 투명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떠오르던 군산복합체에 걸림돌로 여겨졌고, 이내 정치권으로부터 쫓겨났다. 수명이 극히 짧은 입자인 중간자(中間子·meson)처럼, 그도 짧은 순간 과학과 정치를 상호작용시키는가 싶더니 곧 소멸했다. 비슷한 시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중간자가 지속할 수 없음을 알고, 과학 본연의 임무인 진리의 발견을 통해 기여하고자 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학계를 박차고 나와 국제평화운동을 조직했다.
어느덧 바람처럼 20세기가 훌쩍 지나갔다. 인류는 이제 인공지능과 유전자 기술에 대해 뜨거운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새롭고 강력한 과학기술이 나올 때마다 올바른 사용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김영훈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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