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줄이 좌초하는 아파트 리모델링…외면받는 ‘재건축 대안’ [감평사의 부동산 현장진단]

2023. 11. 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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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3호선 잠원역 3번 출구로 나오면 한 사거리가 나온다. 잠원역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만 걸으면 중층 규모의 작은 아파트 단지가 눈에 띈다. ‘잠원한신로얄’ 아파트다. 1992년 입주한 이 단지는 최고 13층, 총 2개동, 208가구 규모로 구성됐다. 잠원역까지 도보 2~3분 거리에 위치했으며 차량으로는 한남IC를 통해 올림픽대로, 경부고속도로, 강변북로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비록 작은 단지지만 잠원한신로얄이 주목받은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리모델링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단지기 때문이다.

최근 잠원한신로얄 입장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수직증축을 위한 2차 안전성 검토에 나섰지만 결국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2017년 10월 잠원한신로얄은 1차 안전성 검토 결과, 한국건설기술연구원으로부터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승인받은 바 있다. 2020년에는 수직증축 리모델링 기술을 적용하는 실증 단지로 선정되며 기대감을 모았다. 하지만 2차 안전성 검토 과정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주민 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일부 주민은 다시 신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조합을 청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때 재건축 사업의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아파트 리모델링’이 사업 진행 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주춤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

리모델링은 일반적인 정비사업인 재건축·재개발과 비교해 사업 추진 속도가 빠르면서 동시에 규제를 덜 적용받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수직증축 추진 과정에서 안전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거나 공사비 상승 등에 따른 갈등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경우가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재건축 규제 완화 등으로 인해 리모델링 장점이 희석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다만 내력벽 철거 허용 등은 물론 ‘1기 신도시 특별법 추진’ 등 간접적으로 리모델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부 정책의 방향성에 따라 시장 분위기가 달라질 것으로 내다본다.

서울 서초구에서 리모델링을 추진 중이던 ‘잠원한신로얄’은 2차 안전성 검토에서 수직증축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이에 단지 내 주민 간 안전성 검토를 다시 신청해야 한다는 주장과, 리모델링 조합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윤관식 기자)
재건축으로 선회하는 단지들

건축 규제 완화로 사업 방식 변경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한양아파트 리모델링 조합추진위원회는 최근 재건축 방식으로 사업을 변경했다.

지난 7월 설문에 참여한 토지 소유주 중 70%가 인근 단독주택과의 통합 재건축을 희망했고, 17%가 단독 재건축을 원하는 등 총 87%가 재건축으로 추진하는 데 뜻을 모았다. 추진위는 리모델링 추진위 해산 절차를 밟고 9월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해당 단지는 1993년 5월 준공돼 올해로 재건축 연한 30년을 꽉 채웠다. 10개동, 최고 15층, 998가구로 구성됐다. 용적률 229%, 건폐율 25%다.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사업성이 좋지 않아 이 단지는 2021년부터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정부의 공급 확대 기조에 따른 재건축 규제 완화 정책이 나오면서 사업 방식을 변경하기로 했다. 공공부지 기부채납이나 임대주택 등이 부담될 수 있지만 최근 시장 분위기를 감안하면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홍제한양아파트는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과 도보 거리에 있다.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도시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이 일부 개정되며 역세권 법적 상한 용적률 120% 허용 등이 의결된 바 있다. 고도 제한과 역세권 용적률 규제까지 완화되면서 사업성 확보에 길이 열렸다는 것이 준비위 측 설명이다.

리모델링에서 재건축으로 선회한 단지는 또 있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현대아파트는 정비사업을 리모델링 조합으로 추진했지만 결국 해산 절차를 밟고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를 결성 중이다.

성동구 응봉대림1차는 2006년부터 리모델링을 추진했지만 2018년 재건축 예비안전진단을 통과했다. 올해 10월에는 정밀안전진단에서 D등급 판정을 받고 조건부로 통과했다. 올해 초 정부의 재건축 안전진단 규제 완화에 따라 조건부 판정을 받은 단지는 별도 적정성 검토 없이 지방자치단체 판단만으로 재건축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수도권 1기 신도시를 중심으로도 재건축 바람이 세지며 기존에 추진했던 리모델링 사업을 접는 단지도 늘고 있다.

경기도 안양 평촌신도시에서는 은하수마을 청구아파트와 샘마을대우, 한양아파트가 리모델링 철회를 결정했다. 고양 일산신도시도 일부 리모델링 추진 단지에서 사업 철회 여부를 놓고 주민 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리모델링을 고려했던 일부 단지는 사업 철회 소식에 매물이 대거 쏟아지기도 했다.

관련 규제는 여전히 요지부동

뚜렷하지 않은 내력벽 철거 기준

리모델링은 재건축이나 재개발에 비해 사업 속도가 빠르다. 준공 후 30년이 지나야 추진 가능한 재건축과 달리 준공 후 15년만 지나도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기부채납이나 공공임대주택 조건이 없어 인허가 절차도 비교적 단순하다. 조합설립부터 준공까지 평균 10년이 걸리는 재건축과 달리 리모델링은 5년 남짓이다. 초과이익환수제가 적용되지 않고 조합원 지위 승계 제한도 없다.

다만 이 모든 조건은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됐을 때 얘기다. 각종 요인으로 사업이 지체되거나 의견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리모델링 사업은 예상보다 훨씬 더 지체되기도 한다. 리모델링을 포기하고 재건축을 다시 추진하면 사업이 더 늘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리모델링업계가 사업성 확보를 위해 대안으로 내놓은 수직증축 리모델링 사업은 실제 준공까지 이어진 사례가 거의 없다.

리모델링 관련 규제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거나 일부 사안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최근 서울시는 안전진단 강화·해체 공사 구조 검토 강화 등 내용이 담긴 ‘공동주택 리모델링 안전기준 개선 방안’을 공개했다. 해당 안에 따르면 앞으로 수평증축 리모델링도 수직증축과 마찬가지로 2차 안전진단을 실시하도록 할 방침이다. 수평증축은 기존 아파트 건물을 수평으로 늘리는 방식으로 비교적 안전성 확보가 수월해 층수를 높이는 수직증축과 달리 1차 안전진단만 통과하면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방안으로 리모델링 문턱이 더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해묵은 이슈인 내력벽 철거 논의도 여전히 답보 상태다. 내력벽은 건물 하중을 견디고 분산하도록 만든 벽이다. 주택법 시행령에 따르면 가구 간 내력벽 철거는 금지돼 있다. 무분별한 내력벽 철거로 인한 건축물 안전성 저하를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리모델링 과정에서 내력벽 철거가 없을 경우 다양한 평면 구성과 구조 설계가 힘들어 실수요자들이 선호하는 설계로 변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소형 면적대가 많은 단지일수록 설계 변경이 더욱 어렵다.

공사비 상승으로 인해 시공사와 리모델링 조합 간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은 리모델링 활성화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2년 전과 비교해 3.3㎡당 공사 비용은 500만원대에서 700만~800만원대로 높아졌다.

경기도 고양시 별빛마을8단지는 시공사 선정을 위한 설명회를 열었으나 참여가 저조해 수의계약 전환을 검토 중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리모델링 규제는 강화되는 반면 재건축 규제는 완화되면서 사업 추진 방식을 두고 단지 주민 간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리모델링의 최대 장점은 신속한 사업 추진인데 공사비 갈등 등의 영향으로 사업이 늦춰지면서 장점이 많이 희석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강승태 감정평가사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3호 (2023.11.08~2023.11.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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