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택배에 굵은 매직으로 주소가 다시 쓰여 있다면? [목사가 쓰는 택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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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형 기자]
모든 일이 그렇지만 처음 하면 낯설고 서툴다. 택배 일도 그렇다. 더구나 물품 분류에서부터 운전, 주차, 배송, 집화, 민원 처리까지 혼자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 처음에는 정신을 못 차린다. 주차하고 가다가 수레도 놓고 물건만 들고 집을 찾느라 뱅글뱅글 돌다 겨우 배송하고 돌아서면 방향감각을 잃어 수레를 어디 놓았는지, 차는 어디 두었는지 모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자기 구역을 정해 다니다 보면 매일 비슷한 일의 반복이라 급속하게 익숙해지면서 시간도 빠르고 여유로워진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최근 나는 확정된 구역 없이 긴급 투입이 필요한 지역에 나가는 지원 일을 하고 있다. 즉, 담당 기사가 복귀하기 전까지 맡다가 임무가 바뀌면 또 다른 곳으로 간다. 새로 임무를 맡을 때마다 매번 다른 곳을 간다는 말이다.
얼마 전 잠시 맡아 배송한 곳은 제법 어렵기로 소문난 동네였다. 그래도 난 자신했다. 처음 택배 일을 시작할 때 워낙 힘들기로 유명한 구역들을 배송해 본 경험이 있어서다. 그런데 내가 맡을 곳의 담당 기사가 비우기 전에 전화해서 먼저 하루라도 둘러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게 좋을 것 같아 담당하기 며칠 전 그 기사와 동승하여 미리 둘러보았다. 다녀보니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특히 작은 골목이 너무 많고 여기저기 꼬여 있었다. 같은 골목에 서로 다른 도로명 주소가 여러 개 섞여 있는 곳도 있었다.
하루 따라 나갔다가 갑자기 부담이 커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미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해당 지역 지도를 도로명에 따라 부분부분 확대 출력했다. 모두 10장이 나왔다. 형광펜과 볼펜으로 둘레와 주요 표시를 했다.
다행히 월요일 배송은 물량이 적다. 그래서 시간이 넉넉한 월요일에 10장의 지도를 가지고 나가 동네와 골목마다 꼼꼼히 살피며 중요 사항들을 지도에 추가로 적어 넣었다. 배송을 마치고도 일부러 한 번 더 돌아보며 특징과 중요한 것을 머리에 입력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여러 차례 복습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약간의 부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예습을 철저히 마쳤다는 뿌듯함에 가벼운 흥분마저 느껴졌다.
▲ 낯선 구역 배송 위해 뽑은 지도 10장 |
ⓒ 구교형 |
역시 복잡한 미로 같은 골목에서는 조금 헤맸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것을 보고 회사 동료들이 칭찬을 해주었다. 하루하루 경험이 쌓이면서 며칠 만에 내 구역처럼 익숙해지니 계속 만나는 분에게는 인사도 나눌 만큼 여유가 생겼다. 이럴 때는 나 스스로 참 대견하게 느껴진다. 어느새 나도 택배에 관록이 붙은 것 같아 뿌듯하다.
말만 들으면 알아듣기 힘들겠지만, 사실 어디든 동네와 길의 특징만 알면 길 찾기와 배송은 크게 어렵지 않다. 더구나 실수도 약이 된다. 길 찾기가 어려워 헤매거나 틀리면 오히려 더 기억에 깊이 남아 나중에는 더 쉽게 길을 찾고 일을 익힐 수 있다. 정말 공부와 똑같다.
지역과 동네마다 도로명의 특징과 패턴을 익히고, 일방통행은 없는지 살피고, 어디쯤 주차할 것인지만 판단하면 어디든 무난히 배송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초보 때는 배송이 어려워 그만두고 싶지만, 오래 하면 너무 단조롭게 느껴져 그만두고 싶어진다. 그런 버거움과 지루함의 고비를 견뎌야 비로소 택배기사로 자리 잡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처음 입사하면 회사에서는 바로 자기 구역을 배정해 주지 않고 상당 기간 여기저기 돌린다. 가만 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택배기사를 지원했지만 정말 해보겠다는 각오로 뛰어든 사람인지, 아니면 여차하면 그만둘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여차하면 그만둘 사람에게 바로 담당구역을 줬다가 그만두면 회사는 물론 고객도 골탕 먹는 일이 간혹 생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
나는 점장의 부탁으로 처음 택배 일을 시작하는 분을 데리고 훈련 조교 같은 일을 몇 번 해봤다. 그럴 때면 나도 새로 일할 분과 함께 하면서 그가 어떤 각오로 오는지를 확인해 본다. 분명히 열심히 할 마음이라고 해서 굉장히 상세하게 택배 일과 해당 지역의 성격과 특징, 주의할 점 등을 설명해 주었다.
일을 마치고도 일부러 전체 구역을 한 번 더 돌아보며 다시 설명해 주고 전체 지역을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다시 연락해도 좋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놓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또한, 담당 지역을 바로 정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저기 다녀보며 그에게 가장 알맞은 구역을 물색하는 의미도 있다. 불필요해 보이는 이 과정이 같은 대리점 택배기사로의 기본을 다지는 데도 참 좋다. 우리는 여러 곳을 다녀보며 꼭 자기 지역이 아니어도 다른 기사들의 배송지가 어디 있고 상황이 어떤지 제법 많이 안다. 그래서 대신 투입되어야 하는 특별한 경우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게 된다.
▲ 좁은 골목의 최강자 다마스 |
ⓒ 구교형 |
왜 그런지 물어보니 지하 분류장 불빛이 어두워 식별하기도 어렵고 분류만 잘해놓으면 배송지에서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서 굳이 주소를 다시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 정도의 자신은 없다.
주소를 다시 쓴다고 해도 쉬운 도로명 주소를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어떤 기사는 굳이 예전 번지 주소를 적기도 한다. 대개 그런 기사는 그 지역배송 경력이 길어 도로명 주소가 도입되기 전의 번지 주소로 길을 익혔기에 굳이 도로명을 다시 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처럼 경력이 부족한 기사는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배송 기사에 따라 보병형과 포병형이 있다. 예전 군대에서 행군이나 훈련이 있을 때 보병은 대부분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걷지만 포병은 '몇 보 이상은 승차'라며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배송 기사도 그와 비슷하다.
나는 매우 보병형이다. 자꾸 차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한 골목을 다 돌만큼 많은 물건을 한 번에 내려 수레에 실어 배송하는 편이다. 차량에 오르내리고 적재함 문을 자주 여닫는 것보다 걷는 게 편하게 느껴져서다.
내가 일하는 곳의 점장은 대표적인 포병형이다. 그는 어차피 자기 배송지를 갖지 않고 때마다 필요한 곳에 지원사격을 나가기 때문에 경승합차인 다마스를 이용한다. 나도 그 차를 이용한 적이 있어 잘 알지만 다마스는 구로동처럼 좁은 옛날 골목이 많은 동네에 최적이다.
'저 정도는 어려울 텐데'라고 여길만한 좁은 골목도 다마스로 파고들어 몇 보 이상이면 무조건 차로 움직인다. 동승해 보면 다마스는 거의 그의 몸이 되어 함께 움직인다. 못 가는 곳이 없다. 베테랑의 관록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택배 일도 내 일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익숙해지고 자기에게 의미가 더해지는 것 같다. 오늘도 똑같은 그 일을 충실하게 반복하는 독자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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