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미국서 온 편지 "제 이름은 강춘강, K방산에 13억 써달라"

이철재 2023. 11. 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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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대전 국방과학연구소(ADD) 박종승 소장 사무실에 해외에서 온 편지 한 통이 전달됐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소인이 찍혔다.

강춘강 여사가 6일 서울 용산 로카우스 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우상조 기자


평소 소장실엔 ‘ADD와 협력하고 싶다’라거나 ‘ADD에 납품하고 싶다’는 내용의 우편물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당시 수상한 해외 우편물 신고가 잇따랐던 때였다. 그런데도 무엇에 끌린 듯 소장실 비서가 편지를 열었다.

‘박종승 소장님께 드립니다. 제 이름은 강춘강입니다. …. ’ 이렇게 시작한 편지에서 강춘강(80) 여사는 손글씨로 유산 100만 달러(약 13억원)를 한국의 방위사업 발전을 위해 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7일 국립대전현충원을 참배한 뒤 ADD에 기부약정서를 전달했다.

강 여사를 6일 만나 기부 이유를 물어봤다.

Q : 왜 기부를 결심했나.
A : 미국에선 나이가 들면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면서 유산을 어떻게 쓸지 정하는 문화가 있다. 나도 유언장을 고민하던 중 한국의 무기가 폴란드에 많이 수출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너무 반가웠다. 북한의 핵ㆍ미사일 위협에 대비하려면 ADD의 국방 연구개발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사후에 받게 될 개인연금 전액을 ADD에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내 돈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보다는 한국을 지키는 데 쓰이길 바란다.

지난 8월 강춘강 여사가 박종승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앞으로 보낸 편지. 국방과학연구소


강 여사는 긴 비행시간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고 한다. 50여년 만에 ADD를 다시 찾기 때문이었다. 그는 1970년 8월 서울 홍릉에서 ADD가 세워졌을 때 창립 직원이었다. 경북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신응균 ADD 초대 소장의 비서로 채용됐다. 영문 문서를 번역하거나 외국 손님과 상담하는 게 그의 주요 업무였다.

Q : ADD 초창기 여건이 어떠했나.
A : 처음엔 ADD의 연구시설이 변변찮았다. 해외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많이 귀국했다. 당시 한국이 잘 살지 못해 그들에게 큰돈을 주지 못했다. 정부가 더 챙겨 주려고 집을 지어줬다. 그래도 외국서 받을 수 있는 급여보다 모자랐다. 그런데도 귀국 인재들은 자주국방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연구했다.
강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ADD를 자주 들러 브리핑을 받고 현안을 꼼꼼하게 챙겼다. ‘뭐 필요하시냐’고 물으면 항상 ‘보리차 한 잔이나 달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강 여사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강 여사에게 ‘여자도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197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상담심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필라델피아 교육청에서 근무하면서 특수아동 교육·상담 업무를 맡았다. 미국 시민권을 땄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다고 한다.

강춘강 여사(왼쪽)가 박종승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이 유산 기부 의사 전달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

Q : ADD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 한국은 대단한 나라다. 내가 대구서 나고 자랐는데 6ㆍ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대구로 몰려왔다. 전쟁 통이라도 학교는 계속 열렸고,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쳤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했다. 한국이 이렇게 노력하는 데 언젠가는 선진국이 될 것이라 믿었고, 지금 선진국이 됐다. 예전에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몰랐는데, 지금은 내 이름만 보고도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후배들이 너무나 고맙다. 한국의 안보를 지키는 데 ADD가 많이 노력했다. 앞으로 늘 업데이트하고(새로운 것을 찾고), 계속 혁신했으면 한다.
강 여사는 “내 기부 결정이 한국 국방연구 분야 기부 릴레이의 시작점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ADD 측은 강 여사의 뜻을 잘 살리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철재 국방선임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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